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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낡은 영수증이 서러웠다
    사회 2018. 1. 12. 15:00

    [HISTORY in] 


    “훗날 엄마는 내게 그 열흘 간의 병원 치료 영수증이 담긴 봉투를 건네주었다. 그 안에는 아빠의 운구 비용 영수증도 들어 있었다. '시체 1구, 근수 얼마, 운임료 7만 원….' 아빠가 이름 없는 화물이 되어 배의 가장 낮은 칸에 실린다. 무연히 일렁이는 남해 바다를 건너 한줌 흙으로 고향에 돌아가 눕는다. 나는 낡은 영수증이 서러웠다.” 


    ⓒ우리학교


    촛불집회의 시위대에 한파에도 굴하지 않고 물대포를 쐈던 국가,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국민들을 테러리스트로 여기고 살인적 진압을 했던 국가. 


    늘 평화를 이야기하고 원수를 사랑하라 이야기하는 종교조차 왜 국가의 폭력에, 전쟁에 눈 감는 것일까. 우리는 왜 은연중에 국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도 좋다고 생각하게 되는 걸까. 


    우리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는 과연 우리를 보호하고 있는 걸까. 상식에 걸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국가에 대해 드는 의심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권력은 본성상 부패하기 쉬운 것이며 제도가 부실한 사회에서 인간의 악한 본성이 폭주할 수 있다. 사회통합과 발전을 위해 국가와 사법 제도가 잘 기능하도록 감시와 견제를 늦추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공장 노동자, 병원 사무장을 거쳐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던 재일교포 강우규씨. 강씨는 1972년 40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그는 노후를 고향에서 보내고 싶다는 생각에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귀국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77년 ‘재일교포 실업인 간첩단’ 사건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강 씨를 포함한 11명이 연루된 대규모 간첩단 사건이었다. 남산으로 연행된 그들은 갖은 고문과 협박으로 간첩이 돼갔다.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된 사람들은 모두 간첩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시민이었다. 그들은 법정에서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아무도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지 않았다.


    재판장은 제1 피고인 강씨에게 사형, 제2 피고인 김기오씨에게 징역 12년, 제3 피고인 고재원 씨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다. 제4 피고인 김추백 씨에게는 징역 3년 6월을 선고했으나 1979년 5월에 만기 1년 3개월을 앞두고 교도소에서 쓰러져 형집행정지로 출소, 열흘 만에 사망했다. 


    김성기, 강용규, 고원용, 이근만, 이오생, 김문규, 장봉일은 집행유예로 석방됐으나,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의 굴레는 그들의 일상을 계속해서 옥죄었다. 김문규 씨는 고문 후유증을 심하게 겪다가 자살에 이르렀다.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은 오랜 기간, 지치지 않고 진실규명을 위한 싸움을 이어왔다. 2016년 마침내 간첩단 사건이 조작됐다는 대법원의 무죄판결을 받아내면서, 40년 만에 진실이 세상이 드러났다. 


    가장 평범한 사람들의 정치적 희생이라는 시대의 아픔을 다룬 <발부리 아래의 돌>은 과거 국가폭력에 의해 간첩이 돼 억울한 옥살이를 한 열한 명 아버지들의 이야기로, 그동안 진실규명을 위해 노력해온 평범한 사람들의 10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버지들의 나라, 고단한 현대사 속에서 어느 아버지인들 그 시절의 올무를 피해갈 수 있었을까. 이제 아버지들 하나하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미래를 성찰하기 위함이며, 애도를 나누는 것은 희망을 키우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 김호정은 ‘재일교포 실업인 간첩단’ 조작 사건의 피해자인 고 김추백 씨의 딸이다. 저자는 사진 속 아버지의 나이를 훌쩍 넘긴 후에야 무죄 판결을 받아낼 수 있었다. 


    너무나 갈망해온 '무죄'라는 한 마디이지만, 막상 손에 쥐고 보니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진실규명이나 무죄판결은 피해자들의 고통을 해결해주는 마법이 아니었던 것이다. 


    과거를 돌이킬 수도 없고 깊은 상처를 회복시키지도 못했다. 피해 당사자들에게는 생생한 현재의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저 지나가는 과거의 하나로 인식되는 것 같았다. 


    이에 저자는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 무죄 판결을 받기까지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제주와 일본을 오가며 사건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을 만났고, 만 장 이상의 수사기록과 재판 자료를 읽고 또 읽었다. 


    아울러 수많은 간첩단 조작사건의 피해자들의 이야기가 ‘과거사’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이야기로,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누구나’의 이야기로,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아픔들과 손잡는 이야기로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 


    이 책은 이른바 ‘발부리 아래의 돌 프로젝트’의 한국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독일의 예술가 귄터 뎀니히는 나치에 의해 탄압받고 희생당한 유대인들을 기리기 위해 그들이 살았던 집 앞이나 실종된 장소에 희생자의 이름, 태어난 해, 사망일 혹은 추방일, 수용소 위치 등을 새겨 넣는 ‘발부리 아래의 돌 프로젝트(Stolperstein Project)’를 시작했다. 


    발부리 아래의 돌ㅣ김호정ㅣ우리학교

    1997년 독일 쾰른에 놓인 첫 발부리 아래의 돌 이후 20년간 유럽 18개국에 5만3000여개의 ‘걸림돌’이 놓이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돌을 찾고, 이 돌 위에서 희생자들을 위한 연주를 하는 예술가들이 생기면서 유럽 전역에 발부리 아래의 돌 프로젝트가 퍼져나가게 됐다. 


    이는 무덤조차 없는 희생자들을 기억하기 위한 노력과 어두운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려는 자세, 즉 사과와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금기의 세월을 건너 40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아내긴 했지만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훼손된 삶에는 상흔이 남아 있다. 이 상흔을 직면하는 것, 아픈 현대사를 직시하는 것은 은폐에 맞서고, 말소에 저항하는 일이다. 


    과거사에 대한 책임은 범죄자나 학살자들의 몫만이 아니다. 희생된 이들을 내 이웃으로 기억하고, 과거의 고통에 맞닿아 있는 우리의 현재를 돌아보는 것이다. 이런 평범한 책임감들이 다른 미래를 가능하게 할 수 있어서다.


    이 책은 저자가 우리 발부리 아래에 놓은 ‘걸림돌’에 걸려 비틀거리기를, 잠시나마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을 우리 곁의 이웃으로 기억하기를 하는 간절함 마음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지데일리 한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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