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여성은 어릴 적 한 번쯤은 동화 속 주인공을 꿈꿔봤을 것이다. <백설공주>나 <신데렐라>, <콩쥐팥쥐>에서 여자 주인공은 어떻게 해피엔딩을 맞이했는가. 왕자님이 올 때까지 독이 든 사과를 먹고 누워 있거나, 구멍 뚫린 독에 물을 붓거나 하는 등 극강의 인내심을 보여준다. 



동화 속 여자 주인공은 항상 인내의 제왕이다. 많은 작품들 속에서 여성은 투덜거리기보다 인내하는 쪽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남성의 폭력에, 바람기에, 거짓말에, 불법행위에 그저 인내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어릴 적 그다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던 소설 속 여성의 모습은, 어른이 되고 보면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여러 여성 문제들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렇지만 현재의 관점에서 그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작품을 읽어내면, 앞으로의 문학 작품에서 보조적인 역할에 그치는 진부한 여성 캐릭터는 사라지지 않을까.


페미니즘 희곡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서맨사 엘리스는 ‘여성’으로서 서른일곱 해를 살아오며 지금껏 만나 온 동화 속 여주인공들이 수적으로나 역할 면에서나 극히 제한돼 있고, 때로는 올바르지 못한 데다 약간은 부적당한 롤 모델을 제시해 왔음을 알아채고 놀란다. 


'내가남자를 차지하기 위해 목소리를 버리고 다리를 얻은 인어 이야기에 그토록 열광했다는 게 기가 막힌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써 놓고 보니 얼마나 기막힌 모욕이었는지가 너무도 뚜렷하다. 게다가 공주가 다리를 얻은 것은 걸어 다니기 위해서도 아니다. 안데르센의 이야기에서 인어는 땅 위에서 살 수 있지만, 인어 공주의 할머니는 우리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물고기 꼬리를 인간이 보기 싫어한다고 알려 준다. 그래서 인어 공주는 외지인의 이해할 수 없는 미적 이상에 맞추기 위해 자신에 게 끔찍한 고통을 가한다. 나오미 울프가 아니라 어느 누구라 도이사실은 불편할 수 있다. 목소리를 잃는 것도 생각해 봐야 한다.『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Titus Andronicus)』(1594)에서 라비니아는 혀와 두 손이 잘리지만, 그래도 피 흐르는 두 팔로 막대기를 잡고 모래 위에 악당의 이름을 써서 (복수를 위해) 아버지에게 알린다 셰익스피어는 라비니아에게 약간의 능동성을 주었다. 그런데 안데르센은 인어 공주에게 수화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왕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그녀의 노력은 그저 그의 얼굴을 서글프게 바라보는 것이 전부다. 왕자는 당연히 그녀의 곁을 떠나 보다 활기찬 사람과 결혼한다. 내가 가진 안데르센 동화책에는 약자가 주인공인 다른 이야기들도 있지만 대개 해피엔드다.(찢어지는 가난을 벗어나 스타 작가가 된 안데르센도 비슷한 인생 여정이었다) 미운 오리 새끼는 백조가 된다 엄지 공주는 작은 왕자와 결혼하고 날개까지 생긴다 게르다는 눈의 여왕에게 납치당한 친구 카이를 구하고, 그의 언 심장을 녹인다. 완두콩 때문에 잠을 못 잔 공주는 시험에 통과하고 왕자를 얻는다. 하지만 인어 공주는 그러지 못한다. 내가 그 이야기들을 직접 읽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공주들에게 실망했다. 십 대 시절에는 모든 동화를 가부장제의 도구라고 거부했다.'(34~35쪽)


세상의 절반이 여자인데도 여성 스스로 우러러보고, 하다못해 참고할 만한 여주인공의 수는 매우 적다. 대부분의 영웅은 남성이고, 여성은 조력자이거나 위험한 모험에 뒤따르는 보상, 혹은 마녀나 부도덕한 유혹자일 뿐이다. 수많은 학교와 교육 당국에서 권장하는 숱한 고전을 들춰 봐도 여성 인물은 부수적이거나 수동적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태반이다. 


엘리스는 <여주인공이 되는 법>에서 자신의 지난 인생을 회고하며 이제껏 자기와 동고동락해 온 고전 속 여주인공들의 삶과 사랑, 좌절과 성공을 되짚어 본다. 그 과정에서 처음 말을 배우기 시작한 유년 시절부터 반항심으로 불타오르던 사춘기를 경유해 첫사랑의 속앓이와 힘겨웠던 사회생활, 작가로서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그동안 독서해 온 책 속의 여주인공들이 늘 자신 곁에 함께해 왔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누구나 성장해 가면서 자기만의 역할 모델, 마음속의 영웅, 위대한 주인공을 모색하고 성실하게 간직한다. 저자도 애초엔 무시무시한 전쟁을 피해 용감히 영국으로 이주해 온 할머니와 어머니를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았다가, 동화 속 인어 공주와 빨간 머리 앤,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작은 아씨들에게 매료된다. 


그러다가 이상적인 결혼에 성공하는 엘리자베스 베넷, 자유로운 성 경험을 누리는 <레이스>의 여주인공들에게도 빠진다. 브론테 자매와 실비아 플라스가 창조해 낸 여주인공들은 물론, 재치와 기지를 지닌 셰에라자드도 피해갈 수 없다. 저나는 인생 각 시기마다 다른 조언을 들려주는 여주인공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비단 자신뿐 아니라 세상 사람 모두가 주인공으로 태어나는 게 아님을, 즉 끊임없는 고군분투 끝에 비로소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저는 일종의 투쟁으로서 고전을 다시 읽으며 그 속의 여주인공들과 머리를 맞대고 논쟁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동안 여성들은 가부장제와 기성 사회가 정해 놓은 대로 고전과 매체를 읽어 왔고, 여성 인물들의 인생관과 태도를 무분별하게 흡수해 왔다. 


하지만 거기에 멈춰 서도, 만족해서도 안 된다. 저자 스스로 체험했듯, 우리가 읽고 보고 듣는 여주인공들의 말과 선택은 한 여성의 삶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다. 이에 본받을 수 있는 여성 캐릭터를 발굴하고, 비판적으로 독해하고, 자신의 일부로 흡수하는 과정은 모든 여성들에게 매우 중요한 경험이다. 


우리의 인생 경로는 사실상 아주 사소하고 섬세한 가르침에 영향을 받는다. 모든 여주인공이 행복한 결혼만을 꿈꾼다면, 그것을 읽은 여성들 또한 자신의 본성, 의지와는 무관하게 천편일률적인 미래만을 그리게 될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여주인공들은 멜라니보다 스칼릿 같은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멜라니의 조용한 미덕은 사라지고, 많은 여주안공이 주로 강인한 면모를 과시한다. 그들은 걱정하는 대신 싸운다. 그들은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The Girl with the Dragon Tattoo) 2005)의 리스베르 살란테르처럼 괴학대 여성의 복수를 하거나 헝거 게임(The Hunger Game)』(2008)의 캐트니스 에버딘처럼 살인을 한다. 그런 뒤 그녀는 단순히 생존하는 것을 넘어 사랑하고 불의와 싸우며, 아주 가끔이지만 연약해지기도 한다. 미첼이 자금『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쓴다면 폰테인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만들지도 모른다. 폰테인 할머니는 스칼릿의 이웃으로 사는 억척스러운 노과로, 어린 시절에 집이 불타고 가족이 살해당한 뒤 무서운 것이 없어졌다. 그녀는 스칼릿에게 말한다, “나는 억센 여자들이 싫어, 나만 빼고. 하지만 네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는 마음에 들어! 너는 훌륭한 사냥꾼처럼 장애물에 투덜대지 않아." 나도 내가 훌륭한 사냥꾼처럼 장애물에 투덜대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싶다. 하지만 나는 폰테인 할머니가 스칼릿에게 한 또 하나의 조언인 “언제나 두려워할 것을 남겨 두렴. 사랑할 것을 남겨 둘 때처럼'이라는 말도 좋아한다. 스칼릿이 정말 용감해지는 것은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자기 감정을 솔직히 받아들이면서부터다.'(143~144쪽)


이 책에는 ‘여주인공’의 중요성에 대한 언급만큼이나 다종다양한 고전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다. 스스로 ‘책벌레’라 칭하는 서맨사 엘리스의 독서 편력은 우리의 향수를 자극하기도 하고, 때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작품을 발견하게 하는 재미를 전한다. 


요즘 사람들에겐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 더 친숙한 인어 공주부터 작가의 꿈을 지닌 상상력 풍부한 여성의 일생을 보여 준 빨간 머리 앤, 언젠가 한 번쯤은 직면할 사랑과 연애, 결혼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재치 있게 일러 주는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 베넷, 만사 제멋대로 행동하며 모든 욕망의 결정체이지만 어느 누구보다 용감무쌍한 스칼릿 오하라, 자신을 속박하는 종교와 진정한 깨달음 사이에서 일말의 의심도 없이 과감히 참된 신앙을 성취해 내는 '프래니와 주이'의 프래니, 재능 있고 총명한 여성이 붕괴되어 가는 과정을 통해 사회 곳곳에 드리운 유리 천장의 존재를 엄중하게 알려 주는 '벨 자'의 에스터를 만날 수 있다. 


<여주인공이 되는 법> 서맨사 엘리스 지음·고정아 옮김(민음사)

또 여성의 자립에 대해 다양한 목소리를 들려주는 '전망 좋은 방'의 루시 허니처치, 자주적인 성생활과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훌륭히 조율해 낼 수 있도록 다채로운 단서를 제공하는 '인형의 계곡', 이룰 수 없는 이상적인 사랑과 현실적인 사랑을 침착히 대조해 보게 하는 '폭풍의 언덕'과 '제인 에어',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숙고하게 하는 '콜드 컴포트 농장', 여성으로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창조해 내는 캐릭터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셰에라자드에 이르기까지, 이 책에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가득 차 있다.


11개의 장을 장식하는 여주인공들 말고도, 각 페이지마다 촘촘히 삽입된 수십 권의 책, 여러 편의 영화와 드라마가 여성 캐릭터의 스펙트럼을 더욱 확장한다. '작은 아씨들'에선 은근슬쩍 넘어가 버린 문제, 즉 ‘남녀 사이에 친구가 될 수 있을까?’라는 케케묵은 질문이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에서는 전혀 다르게 다뤄진다. 


'내가 어머니에게 책 속 여주인공들을 다시 만나는 이야기를 처음 했을 때 어머니가 말했다. 끝에는 네가 주인공이 되겠구나.” 나는 그 말에 격렬하게 반박했다. 사실 우리의 대화는 늘 격렬하다. 우리는 충동출신이 시끄러운 가족이라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덧붙일 것은 내가 아니라 어머니가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나는 어미니는 흥미진진한 인생을 살았는데 내 인생은 지루하고 뻔할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소설 속 여주인공들을 탐색하기 시작한 것은 모두 어머니처럼 주인공이 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주인공이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몰랐다. 나는 우리 어머니가 주인공이 된 것은 어머니에게 사건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2년 동안 여주인공들에 대해 생각하고 서른일곱 살의 나이가되어서야 나는 비로소 우리 어머니가 주인공이 된 것은 어머니가 한 일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온갖 미신을 진지하게 믿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명을 거부했다. 어머니는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잃고 낯선 세상에 던져졌지만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언어로 살면서 새 삶을 극복하고 희망으로 만들었다. 우리 어머니도 셰에라자드처럼 나쁜 일이 일어났을 때 희생되지 않았다. 그 대신 자기 인생의 이야기를 쓰고 또 썼다.어머니는 그렇게 해서 주인공이 되었다.'(346~347쪽)


이 책은 저자 자신의 자서전인 동시에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모든 여성들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읽지 않았더라도, 이를테면 콜린 퍼스가 등장하는 BBC 드라마로 리지 베넷을 만났다거나 영화 '비커밍 제인'만 본 독자라 할지라도 저자의 이야기에 충분히 빠져들 수 있다. 


이렇듯 이 책은 여성 캐릭터, 분명 한 권의 책 속에 존재하지만 세상의 모든 매체와 우리 일상 사이사이에 수없이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여주인공들의 삶을 들려준다. 한평생 살아오면서 한 번은 꼭 만나 봤을 그들의 인생, 말, 선택, 사랑, 성공과 실패가 우리로 하여금 자기 삶을 돌아보게 해준다.


지데일리 정용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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