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섬]


지난 4월 국세청은 삼성전자에 4700억 원 안팎의 세금 추징을 통보했다. 국세청은 해당 기업이 국외 특수 관계 법인과의 이전 거래를 통한 가격 조작으로 탈세를 했다는 입장이었고, 해당 기업은 이를 인정할 수 없다며 불복 움직임을 보였다. 이처럼 기업 외에도 개인 부호들의 역외 탈세 혐의 소식이 뉴스에 오르내린다.


다국적 기업이나 슈퍼리치들이 이러한 절세와 탈세, 거래 조작 등을 벌이는 주 무대는 ‘조세 피난처’다. 역외 시장은 한때 마약과 도박 등 조직범죄와 관련된 자금이 은밀히 거래되는 시장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국내 자산 순위 30대 그룹도 해외 조세 피난처에 167개 법인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세 피난처는 조세 정의의 왜곡에만 관계되는 것은 아니다. 한 나라 안에서의 불평등한 부의 이전, 나아가 국제적으로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격차를 발생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조세 피난처에서 이뤄지는 역외 거래가 현대 금융과 글로벌 부의 이동에서 중핵이 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보물섬>은 역외 거래의 주 무대인 조세 피난처의 실체를 한눈에 조망하고 있다.


*보물섬, 니컬러스 색슨, 이유영, 부키

저널리스트이자 조세정의네트워크 상근 연구원인 지은이 니컬러스 색슨은 1997년 우연히 계획했던 가봉 취재 여행에서 엘프 사건과 맞닥뜨리게 된다. 엘프 사건은 프랑스 석유 회사 엘프 아키텐과 프랑스 정계 고위층, 가봉의 통치자 오마르 봉고를 연결하는 거대한 부패 시스템이 드러난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수사 검사들은 서류상의 흔적을 쫓다 가봉,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저지 등의 조세 피난처를 만날 때마다 사건의 실마리를 놓치게 된다. 조세 피난처라는 역외 세계의 거대한 비밀주의에 막혀 더 이상 이야기가 진전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아프리카에서 빠져 나온 돈은 어디로 갔을까?


지은이는 2005년이 돼서야 실마리를 잡게 됐다. 미국 정부가 해외로부터 자금을 끌어들이기 위해 면세 혜택과 비밀주의를 제공해 자금을 유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듣게 된 것이다. 이는 곧 미국 정부의 글로벌 전략의 핵심이었으며, 바로 이러한 인센티브상의 조그마한 변화를 좇아 금융 자본이 전 세계를 흘러 다니고 있는 것이었다.


아프리카에서 빠져 나온 자본은 은행가와 변호사, 회계사 집단과 조세 피난처의 활약으로 유럽과 미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들 아프리카의 문제로만 볼 뿐 이를 가능하게 하는 그 이면의 시스템 자체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지은이는 범죄자들이 암약하고 있는 지하 세계와 금융 엘리트들, 외교와 정보 기득권 세력과 다국적 기업들이 역외 체제를 통해 하나로 연결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지은이의 추적과 취재에 의해 파악된 조세 피난처들은 지금 글로벌 경제의 중핵을 이루고 있다. 지배 엘리트 계급과 범죄자에게 환상적인 도피처이자 거대 금융 이권 세력의 더할 나위 없는 친구였던 조세 피난처는 글로벌 금융 위기의 핵심 요소다.


이 책에서는 조세 피난처를 크게 유럽계, 영국계, 미국의 세 그룹으로 나누고 있는데, 영국계 조세 피난처들이 전 세계 조세 피난처의 절반을 차지한다. 지은이는 이 영국계 조세 피난처들을, 영국을 중심에 두고 거미줄처럼 세계 각지에 퍼져 있다 하여 ‘거미줄 네트워크’라 부른다.


이 거미줄의 한가운데에는 런던 금융가 시티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 바깥 겹에는 영국 왕실령 섬들인 저지, 건지, 맨 섬이, 그 다음 겹에는 세계 제5위의 금융 센터인 케이맨 제도를 비롯한 영국의 해외 영토들, 그리고 그 밖에는 홍콩, 바하마, 싱가포르 등 영국에서 독립했지만 아직 영국의 입김이 영향력을 미치는 나라들이 자리한다.


영국은 저지나 케이맨 같은 영국계 조세 피난처와 적절히 거리를 유지한다. 실제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면서도 대외적으로 문제가 생겼을 때는 “정치적으로 자치권이 있는 곳이기에 우리가 직접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라고 둘러대는 것이다.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이들 지역에서 ‘탈식민화’가 의미하는 것은 곧 영국계 조세 피난처로 활용되는 것이었다. 지은이는 이를 ‘대영제국의 부활’이자 현대적 형태의 식민주의라고 비판한다.


미국 역시 대표적인 조세 피난처다. 유로마켓이 열리자 미국 은행들은 자국의 규제를 피해 런던으로 달려갔다. 그러다 1981년 IBFs(미국역외금융시장)가 설립되어 자체 역외 채권 시장을 보유하게 되면서 미국은 갑자기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조세 피난처로 부상했다.


미국은 또 1990년대 말 QI(적격 중개 기관) 제도를 도입, QI로 지정된 은행들이 예금주가 미국인이 아닌 경우 그 신분을 밝히지 않고 비밀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줬다. 세금 구조가 연방과 주 차원으로 이원화돼 있는 미국은 주 정부 수준에서도 역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데, 특히 미국에서 두 번째로 작은 주인 델라웨어가 대표적이다. 1981년 델라웨어 주는 ‘금융 센터 개발법’을 통과시켜 미국에서 200년 동안 규정해 온 이자율 상한선을 철폐시켰고 이는 다른 주로도 급속히 확대됐다.


이처럼 영국과 미국, 네덜란드, 스위스, 룩셈부르크 등 선진국들 자체가 역외 금융 행각을 벌이고 있는데, 이른바 ‘부자 나라 클럽’이라는 OECD가 1990년대 초 조세 피난처 블랙리스트를 만들었을 때 거기에 OECD 회원국이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던 것은 너무 당연했다.


아울러 그 OECD 블랙리스트마저 지금은 빈 깡통 수준이 됐다. OECD가 내건 허술한 협정에 참여하겠다고 ‘약속’하는 것만으로도 블랙리스트에 오르지 않을 수 있는 ‘면죄부’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조세 피난처들은 “공동 노력에 참여하는 동반자들”이 됐다. 국제투명성기구(TI)가 발표하는 부패 순위에서 미국, 영국, 스위스 등은 “가장 깨끗한 나라”에 속해 있다. 그러나 2009년 11월 금융 비밀주의 체제들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전문가 조직인 조세정의네트워크(TJN)가 글로벌 금융에 제공되는 금융 비밀주의 측면에서 각 나라가 수행하는 역할 정도에 따라 순위를 매긴 ‘금융 비밀주의 지수(Financial Secrecy Index)’를 집계한 결과, 미국, 룩셈부르크, 스위스, 케이맨 제도, 영국이 순서대로 1∼5위를 차지했다.


이 책은 조세 피난처를 중심으로 역외 체제의 지난 100년을 되짚어 보면서 이 체제가 전 세계에 걸쳐 끼친 해악을 드러낸다. 이는 곧 현대 금융 자본의 추악한 100년간의 이면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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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daily 지데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