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마을 혁명≫은 충남 연기군 조치원에서 마을 이장을 하고 있는 강수돌 교수가 2005년 5월부터 조치원 신안1리 마을 이장을 하며 주민들과 함께 벌였던 고층아파트 건설 반대 운동에 관한 기록이다.

 

나부터 마을혁명ㅣ강수돌 지음ㅣ산지니 펴냄 강 교수는 1997년 고려대 세종캠퍼스에 부임했다. 1999년부터는 조치원 신안마을에 귀틀집을 짓고 살면서 ‘자연이 최고의 교과서’라는 믿음으로 세 명의 아이들을 시골에서 키웠고, 돈의 경영 대신 삶의 경영을 탐구하며 죽은 이론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실천을 추구해왔다.

 

건설·투기 자본의 전원마을 ‘공습’

 

전국의 개발 바람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2005년 ‘행정도시특별법’이 통과하고 난 후 충청권에는 거대한 건설자본과 투기자본이 몰려 난개발이 진행 중이다. 조용하게 농사짓고 살던 신안마을도 그 바람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강 교수가 조용한 단층 귀틀집을 짓고 살고 있던 시골 마을에 15층이나 되는 고층아파트가 1120세대나 들어서려고 하고 있었던 것.

 

:::그렇게 나는 대학 교수라기보다 마을 주민으로서 이 싸움에 온몸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내가 어디에 살건, 내가 아끼는 마을과 자연이 처절하게 망가지는 것을 마냥 눈뜨고 볼 수 없었기에. 마을과 자연을 아름답게 지키자는 것, 이것이 출발점이고 종착점이다.:::

 

마을사람들이 조상 대대로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온 논과 밭, 과수원과 구릉을 허물고 앞산 뒷산도 다 가리는 시멘트 흉물 덩어리를 세우는 계획을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에 강 교수는 분노한다. ‘개발이나 성장이 진정한 삶의 가치일 수는 없다’는 신념에서 그는 마을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직접 나서기로 결심한다.

 

강 교수는 “많은 사람들이 대자본이나 건설회사와 싸워봐야 이기기 어렵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고, 맨땅에 헤딩하는 꼴이라고 말리는 사람도 있었다”면서도 “비록 힘든 일이 있더라도 지금까지 공부해온 것들이 바로 이런 삶의 현장의 문제를 외면하지 말고 직접 부딪쳐 해결하는 데 쓰려는 것이었다는 생각으로 마을 주민들과 함께 투쟁에 뛰어들었다”고 술회한다.

 

거대 자본과 국가 권력의 횡포에 객체로 머물 것인가?

 

이 책에 따르면, ‘그들만의 혁명’은 당초 주민들에게 설문지를 돌려 의견을 모은 후 군수에게 진정서를 내는 것으로 시작했다. 도저히 아파트가 들어설 자리가 아닐뿐더러 도시계획상으로도 저층 위주의 생태적 대학문화타운에서 고층아파트 건설이 가능한 지역으로 바뀐 데에는 주민들 이름을 도용한 가짜 서류가 결정적이었음을 밝혀냈다. 천 세대가 넘는 아파트가 들어섬에도 불구하고 1년에 차량이 1대씩 증가할 거라는 어처구니없는 교통영향평가가 버젓이 아파트 승인의 근거서류가 됐다는 사실에 국가행정이 건설자본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연기군청, 충남도청 앞 시위, 청와대와 국회, 건설사 앞에서의 일인시위를 진행했다. 싸움의 과정에서 압도적인 주민들 지지로 이장직을 맡게 된 강 교수는 이 모든 일을 주민들과 함께했다.

 

:::나는 우리 주민들과 함께 행정심판청구(2005년 7월)를 거쳐 두 가지 소송, 즉 도시계획 결정 처분을 취소하라는 소송과 고층아파트 사업 승인을 취소하라는 소송을 걸었다(2006년 4월). 행정당국과 벌이는 법적 싸움이었다. 우습게도 시행사 측에서 선임한 변호사가 행정당국을 변호했다. 저들이 한통속임이 공식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아파트 반대 소송은 패소하고 2007년 1월부터 본격 공사에 돌입하게 됐다. 그러나 2009년 하반기에 들어 건설자본은 ‘제 꾀에 제가 넘어가고 말았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온갖 탈법과 주민 이간질 등으로 시작된 고층아파트의 결과는 참담했다. 2% 분양률에도 못 미치고 자금이 돌지 않아 흉물 시멘트 덩어리만 남겨놓은 채 공사를 중단하고 철수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 것이다.

 

자본이야 손해를 좀 보고 떠나면 그뿐이지만 남겨진 시멘트 덩어리 때문에 주민의 환경권은 무참히 훼손됐다.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비참한 상황에서 강 교수는 눈앞의 흉물이나 진절머리 나는 일들에 대해 유머와 위트, 농담과 익살로 넘기는 재치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좀 더 적극적으로 흉물 덩어리가 연출하는 나름의 미학, ‘흉물의 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일례로, 흉물 아파트가 지난 가을 늦은 오후, 석양의 해를 반사해줄 때 생각보다 아름다운 풍광이 드러나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다. (…) 게다가 우리 집에서 키우는 수탉이 ‘꼬끼오― ’라고 울어 제칠 때 저 흉물은 또 한 번 ‘꼬끼오― ’라는 메아리로 응답을 한다. 원래 메아리 울림은 깊은 산 속에서나 들을 수 있는 것인데 저 시멘트 숲조차 ‘숲’이랍시고 우리 집 바로 앞에서 메아리 선물을 주고 있다.:::

 

생동하는 마을 공화국

 

아파트 공사를 막지는 못했지만 강 교수는 이 싸움을 통해 진정한 마을 주민이 됐음을 커다란 수확으로 여긴다고 한다. 마을 한쪽에서 조용히 살던 사람이 비로소 온전한 마을 주민이 된 것이다. 마을과 자연을 지키는 일에 마을 주민들이 혼신을 다해 함께 나서고 지키려고 했던 그 ‘과정’은 이후 생동하는 마을공동체를 만드는 데 큰 힘이 됐다.

 

무엇보다 강 교수가 이장 임기를 맡는 동안 신안마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2008년에 시작된 <신안리 골목축제>는 올해로 3회째를 맞았는데, 마을 주민들과 이웃한 고려대, 홍익대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자율적 문화창조와 공동체문화의 모범이 되고 있다. 마을회관에서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글쓰기 교실이 열리고, 지난엔 2500여 권의 새 책으로 마을도서관까지 만들었다.

 

강 교수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뜻밖인 일이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아무 연고도 없는 충남 조치원이 삶의 터전으로 정해진 일이고, 그 두 번째가 마을 이장이 된 것이라고 한다.

 

교수와 마을 이장. 얼핏 어울리지 않는 직함이기도 하다. 싸움이 한창일 때 건설사 측에서 “마을 사람들이 무식해서 교수가 마을 이장을 하느냐”고 하는 공격을 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마을 주민들은 “우리가 수준이 높아서 교수를 이장으로 뽑았다”고 껄껄 웃었다는 일화도 들려준다.

 

자신의 삶에서 아주 특별한 기간이었다면 기간이었을 이장 임기를 끝내고 강 교수는 이제 마을 도서관장으로 마을에 봉사하며 살겠다는 뜻을 비쳤다. 이 책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5년을 정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