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

 

1928년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학부생을 대상으로 우리 후손을 위한 경제적 가능성이라는 강연을 펼쳤다. 이 강연은 자본주의에 반해 태동한 소련을 경계한 것으로, 학생들이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보다 더 효율적인 유토피아 기획임을 납득시키는 데 있었다.

 

2년 뒤 강연 내용은 수정을 거쳐 같은 제목의 짧은 에세이로 출판됐다. 케인스는 에세이에서 자본주의가 펼칠 바람직한 미래상을 보여 주기 위해 경제 논리를 적절히 활용해 손자 세대의 세상 모습에 대한 예언을 내놓았다.

 

내용인 즉, 자본 축적과 기술 진보에 의해 100년 뒤 선진 국가에서의 생활 표준은 4배에서 8배까지 더 높아져 있을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당 15시간만 일해도 물질적 필요가 충족된다는 것이다. 이에 인류는 처음으로 경제적인 걱정거리에서 벗어나 자유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여가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지 등 자신의 진정한 문제를 만나게 된다는 예측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에 비춰볼 때 케인스가 내다본 2030년의 현실가능성은 밝지 않아 보인다.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 로버트 스키델스키‧에드워드 스키델스키 지음, 김병화 옮김, 부키 펴냄

 


<우리 후손을 위한 경제적 가능성>1930년대 동시대인에게 자본주의의 유토피아적 미래상을 설명한 한편의 기발한 재담이라면,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는 이 빗나간 예언을 다시 꺼내들면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미 관심을 잃고 질문조차 포기한 좋은 삶이라는 과제를 되살리고 있다.

 

이 책의 두 지은이이자 부자 관계인 로버트 스키델스키 에드워드 스키델스키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형성된 인간의 가치관에 대한 체계적이고 역사적인 고찰을 통해 우리가 꿈꿔야 할 가치 있는 삶의 모습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한다.

 

케인스는 사회적으로 발생한 끝없는 욕구의 망령을 지적했지만 그냥 무시해 버렸다. 그의 에세이 나머지 부분은 필요라는 것이 모두 절대적이라는 가정 위에서 전개된다. 왜 그렇게 했을까? 상대적 필요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가계 소비의 대부분이 식비와 주거비, 의류와 난방 등의 항목에 들어가던 시대였다. 경쟁적 소비에 드는 돈은 전체로 보면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날 그러한 사정은 뒤집어졌다. 빈민층조차 가계 소비의 큰 부분이, 아무리 보아도 물질적으로는 꼭 필요하지 않지만 지위를 유지하는 용도라는 항목에 들어간다.

 

과거 성장에 대한 케인스의 전망은 정확했다. 세계 경제의 1인당 소득 성장이 2000년 이미 4배를 넘어섬으로써, 그의 예견 범위 안에 들어왔다. 틀린 것은 노동 시간에 대한 전망이었다. 책은 이 가정이 실패한 이유를 생산성 증가로 인한 이익을 노동자들이 갖지 못하게 된 상황과 자본주의가 부추기는 인간의 끝없는 욕구 탓으로 본다. 이 두 장애물은 복합적으로 작용해 소유욕의 윤리를 만들어 내고, 이 윤리는 사회가 목적도 없는 부를 계속 창출하도록 운명 지운다는 설명이다.

 

결국 케인스의 오류는 자본주의가 해방시킨 돈벌이에 대한 사랑이 어느 정도 인간의 절대적 필요를 채우고 나면, 사람들은 문명 생활 속에서 그 결실을 자유롭게 맛보게 되리라 믿은 데 있다. 자본주의가 끝없는 욕구를 창출하는 새로운 동력을 제공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책은 악마와 계약을 맺은 대가로 상상도 못한 힘을 얻는다는 파우스트 전설에서 인류가 잠시 이용하려다 오히려 그 포로가 된 자본주의의 본질을 읽는다. 서구에서 오랫동안 변주된 파우스트 전설은, 악은 그저 물리쳐야 하는 부정적 특질이 아니라 인간사에서의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힘이라는 생각을 포함하고 있다.

 

이전의 경제관념에서 돈에 대한 애착은 도덕적으로는 상스럽고 역사적으로는 파괴적인 태도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파우스트의 계약과 같이 좋은 결과를 위해 악한 동기를 허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만연하면서 자본주의는 돈을 숭배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모든 족쇄를 풀어버렸다.

 

마키아벨리의 경우 목적 달성을 위해 백성의 변덕과 탐욕을 이용하는 군주를 현명한 군주로 상정했는데, 사회사상가 토마스 홉스와 존 로크가 이를 계승했다. 경제학에서는 버나드 맨더빌이 도덕률을 새로 제시했다. “부유하면서 악하거나 가난하면서 덕성스러울 수는 있으나 부유하면서 덕성스러울 수는 없다면 당신은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점차 탐욕이라는 낡은 단어는 밀려나고 이기심이라는 무색무취한 단어가 들어섰다. 일단 그 윤리적 불명예를 떨쳐 버리고 나자 돈벌이는 공개적으로 인과관계에 입각해 다뤄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추세를 선도한 것은 스코틀랜드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애덤 스미스였다. 파우스트적 협상을 암묵적으로 인정한 면에서는 마르크스 같은 혁명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탐욕과 고리대금이라는 악마는 인간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해 준 다음 무대를 떠날 것이라는 조건 아래에서 해방됐지만, 모든 동화가 그렇듯이 악마의 계약은 말뿐이다. 자본주의는 부를 창출하는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발전했으나, 정작 우리는 개화된 용도로 그 부를 활용할 능력을 상실했음을 책은 자본주의 발전 과정과 그 배경에 깔린 철학사상의 변천을 통해 확인한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부족하다"는 거짓말

 

앞으로 나올 이야기는 좋은 삶을 이루는 물질적 조건이 적어도 세계의 부유한 지역에서는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다만 맹목적으로 성장을 추구하다 보니 좋은 삶은 계속 다른 것들에 밀려나 버린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정책이나 다른 공동의 행동 양식의 목표는 건강, 존중, 우정, 여가 등 삶의 좋은 것들을 모든 사람이 쉽게 얻을 수 있게 해 주는 경제 구조를 확립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경제 성장은 목표로 삼아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여분의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한국 사회의 성장 신화가 균열 조짐을 보이면서, 고질적인 부의 불평등은 심화되고 삶의 질에 관한 각종 지표는 세계 최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책은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이 진정 우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부채질한 탐욕에 휘둘린 탓인지 묻게 만든다.

 

그러면서 끝없는 욕구를 부추기는 자본주의적 가치관을 대체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이를 위해 최근 성장 지상주의에 맞서 활발히 활동 중인 행복 경제학과 환경주의의 논의조차도 비판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는다.


책은 이러한 고찰을 거쳐 자본주의가 주입한 아무리 많이 가져도 충분치 않다는 탐욕의 부추김에 맞서, 좋은 삶을 위한 일곱 가지 기본재(Basic goods) , 건강과 안전, 존중, 개성, 자연과의 조화, 우정, 여가 등의 개념을 끌어낸다.

 

이는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 경제 성장과 욕구의 무한한 자극이 우리 삶의 목적이 아니라면, 무엇을 가져야 만족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그러면서 정치적으로 조금만 용기를 낸다면 좋은 삶과 좋은 사회라는 이념을 중심부의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는 비전을 제시한다.

 

정책과 사회 공동의 목표는 경제 성장이 아니라 기본재를 사람들이 쉽게 얻을 수 있도록 돕는 경제 구조를 만드는 데 둬야 한다는 게 이 책의 주장이다.

 

책은 이와 함께 기본재를 강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노동조건 개선, 소비정책 전환, 세계화의 속도 조절, 자본 도피와 핫 머니의 통제 등 사회정책을 거론하면서 지금의 무한경쟁 체제를 벗어날 것을 권한다. 무엇보다 우리가 영위하는 경제 활동이 무엇을 지향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깊이 성찰해볼 것을 주문한다.

 

 

손정우 기자 <함께하는 우리들의 세상이야기 지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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