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으니 세상이 달라졌어요.” 


처음 엄마가 된 현미 씨 눈앞에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아이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보여 주고 즐거움을 선사했다. ‘아이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잠든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아아 좋아”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돌봐줘야 하고, 사랑하고, 일평생 지근거리에 두고 지낼 존재를 만나면서 내면의 즐거움이 커졌다.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더욱 단단해졌다. 


그러나 반대편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었다. 어느 날부터 현미 씨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도 늘 자신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아이와 함께 있다가 잠깐 졸을 때, 퇴근 후 파김치가 돼 책 한 권조차 읽어 주지 못할 때면 죄책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명절날 시댁 부엌에서 놓여나지 못할 때, “남편한테 아침밥은 차려줘?”라고 사람들이 물을 때, 맞벌이를 해도 남녀 책임의 무게를 다른 것으로 간주할 때…. 울컥거리는 마음이 입가를 맴돌았다. 


어느 날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의 무게’가 이렇게 무거울 리 없는데, 이토록 소중한 가족과 함께라면 일상이 좀 더 기껍고 행복해야 할 텐데. 현미 씨는 즐거움을 되찾기 위해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찾기 시작했다. 


위의 이야기처럼 <엄마의 언어로 세상을 본다면>은 현재 30대를 살고 있는 한국 여성들의 보편적인 삶에 관한 책이다. 1980년대에 태어나 희미한 가부장제의 틈에서 사회적·경제적 성취를 위해 달려오다 결혼으로 ‘여자의 현실’을 알아버린 30대 기혼 여성의 흔한 일상이다.


하지만 그 일상 속에서 엄마들이 겪는 문제들의 뿌리는 한국이라는 곳에서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사회 문제와 맞닿아 있다.  때문에 지극히 개인적으로 보이는 저자의 경험과 고민은 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도약이기도 하다. 


현미 씨가 느꼈던 ‘죄책감’의 근원에는 모성 신화뿐 아니라 ‘애가 나처럼 상처받고 자라면 어쩌나’라는 불안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서른 살 전까지만 해도 그녀에게 출산은 ‘영혼이 뒤바뀌어야 가능한’ 삶의 선택이었고, 아이는 언젠가 멸망할 지구에 후손을 남겨 고통을 겪게 하는 것이었다.


현미 씨가 비혼과 비출산을 다짐했던 배경에는 성장과정이 있었다. 어린 시절,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폭력을 휘두를 때마다 엄마는 ‘너만 없었어도…’라는 혼잣말을 했다. 아버지가 또다시 집 안을 뒤엎은 날, 동네 여인숙 방바닥에 누워 생각했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할까?’ 


부모님의 관계가 안정되고 불쌍한 엄마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날 수 있게 된 뒤에야 그녀는 연애를 시작했다. 경제적으로 독립을 이룬 뒤에는 성인이 된 자신을, 결혼을, 출산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아이를 낳고 키우며 단단한 어른이 됐다고 믿었는데, 어느 날 머릿속에 의문점 하나가 떠올라 가슴을 가득 채웠다. ‘우리 부모님은 나한테 왜 그랬을까?’ 


어린 시절의 상처는 어떤 형태로든 나타나 자녀 양육에 영향을 미친다. 대개 두 가지 형태다. ‘부모님처럼 하지 말아야지’라며 극심한 강박증으로 자신을 검열해 무리하게 버티는 경우와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똑같이 되풀이하며 자학하는 경우다.


<엄마의 언어로 세상을 본다면> 이현미 지음·김시은 그림(2018·부키)

현미 씨는 첫 번째 부류였다. 아이가 유년의 혜택을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엄마는 강인해야 한다고, 감정을 아이에게 내색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점점 힘에 부쳤다. 나약함을 혐오하는 자신을 들여다보자 부모님과 화해하지 못한 어린 현미가 보였다. 아직 겪어야 할 성장통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육아는 유년의 상처와 마주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아이를 키우면서 내면에 울고 있는 아이를 보듬게 되고, 그 상처와 화해하는 용기도 내게 된다. ‘아이를 낳아봐야 진짜 어른이 된다’는 말은 바로 이런 과정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엄마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에게 현미 씨는 ‘너만 그런 것이 아니야’라고, ‘이런 나도 엄마가 되었다’면서 조심스레 손을 내민다. 


육아휴직 기간 현미 씨의 또 다른 이름은 ‘털 치우는 노예’였다. 아이와 고양이 두 마리를 함께 키우는 그녀에게 사람들은 “고양이가 아이를 할퀴면 어떻게 해?” “동물 털이 애한테 안 좋다던데”라며 우려를 표했고 시댁과 친정 어른들에게 고양이는 눈엣가시가 됐다.


아침저녁 집 안 곳곳을 청소기로 밀었는데도 아기 입술에 털이 끼어 나풀거릴 때면 “아아아, 또 털...” 탄식이 절로 나왔다. 임신 중 의사에게 일명 ‘고양이 기생충’이라 불리는 ‘톡소플라스마’ 때문에 아기가 기형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공포를 경험했다. 


반려묘 인구가 374만 명을 넘어선 지금, ‘육아육묘’ 문제는 더 이상 특별한 집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기가 생기면 반려동물들은 건강 문제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파양과 유기의 대상이 된다. 생명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냥줍’을 했던 현미 씨는 육아 육묘의 공존을 위해서 고양이에 대한 무지와 편견을 살펴본다. 그 과정에서 우연히 인생의 의미도 얻는다. 


까칠하고 예민했던 여자도 엄마도 되면 부드러워진다는 이야기를 사람들은 종종 한다. “저도 이럴 줄은 몰랐는데, 제가 ‘오지라퍼(오지랖이 넓은 사람을 일컫는 요즘 말)’가 되었네요”라는 고백도 줄을 잇는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사회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엄마들이 사회에 관심이 많아진 이유는? 내 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사회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도 있지만, 여자들은 엄마가 된 동시에 사회적 최약자가 되는 경험을 한다. 가장 낮은 곳에서 보면 사회 구석진 곳의 민낯이 더 잘 보이는 법이다. 현미 씨는 임신부였던 한 지인의 폭행 경험을 들으면서 이 땅에서 여자로, 엄마로, 약자로 산다는 게 무엇인지 생각한다. 


‘맘충’과 ‘노키즈존’도 같은 맥락이다. 이 같은 혐오 표현 또한 우리 사회의 ‘공존의 조건’을 파괴할 뿐 더 좋은 세상을 만들지 못한다. 그사이를 중재하고 타협안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때 비로소 제로섬이 아니라 해답을 찾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에 현미 씨는 지하철 노약자석이 비어 있으면, 비워둘 게 아니라 앉기로 했다. 약자에게 먼저 배려하는 사회에는 노약자석이 필요 없으니까. “다시 태어나면 되고 싶은 것은?”라는 질문에 언제나 ‘무(無)’라고 대답했던 소녀, 불안하고 나약해서 세상에 생명을 내어놓는 것에 겁을 냈던 소녀는 이제 사회와 그 안의 문제들을 고민하는 단단한 사람이 됐다. ‘아이를 낳으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이런 것이 아닐까.


지데일리 한주연 기자


Posted by have a Good story, gdaily 지데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