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in]

"추억은 오늘이고, 희망은 내일입니다."


ⓒ수오서재


미국의 국민 화가,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일명 ‘모지스 할머니’라 불리는 그녀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그녀 나이 76세였다. 


평생 농장을 돌보고 버터와 갑자 칩을 만들어 팔며 바지런히 살던 그녀는 소일거리 삼아 놓던 자수가 관절염 때문에 어려워지자 바늘 대신 붓을 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늦었다고 말할 때면 무언가를 시작하기엔 ‘지금’이 제일 좋은 때라고 받아치는 호쾌한 할머니였던 그녀는 80세에 개인전을 열고 100세에 세계적인 화가가 됐다.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는 92세에 출간한 자서전과 사랑 넘치는 그림 67점을 한데 모아 엮었다. 매일에 충실하고 변하는 계절에 순응하며 그 안에서 기쁨을 찾는 소소한 일상을 담은 그녀의 이야기와 그림은 시대를 초월하여 감동과 희망을 전한다. 


'봄이 되면 참 할 일이 많습니다. 이른 봄, 아직 눈발이 흩날릴 때 숲으로 가서 그해 처음으로 피어난 아르부투스 꽃을, 눈 속에서도 피어나는 그 꽃을 찾아다니거나 갯버들을 꺾던 그날들이 그립습니다! 그럴 때면 하느님의 뜻 가까이, 대자연 가까이에 다가선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지요. 생각해보면, 대자연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이고 아름다움과 평온을 간직한 곳이며, 삶의 소음에서 벗어나 고요해지기 위해 간절히 가고픈 그런 곳이 아닐까요.'(96쪽)


그녀는 책 속에서 줄곧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한치 앞도 모를 인생이지만 아직은 살아볼 만하다고.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늦은’ 나이에 취미 삼아 시작한 그림이었지만, 나이는 차치하고도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은 사람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출연은 물론이고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타임'지 커버를 장식했으며,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도 제작됐다. 


92세에는 자서전을 출간하기에 이르는데, 하나의 문화 현상에 가까웠던 인기를 생각해본다면 할머니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건 당연했다. 


'나는 다혈질처럼 흥분해서 난리를 피운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젊었을 때도 그런 적이 없어요. 화가 나면 그저 가만히 머릿속으로 ‘이쉬카비블’이라고 말해요.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엔 흔히들 쓰는 표현이었고, ‘악마에게나 잡혀가라’와 비슷한 의미라고 하더군요. 사람이 흥분을 하게 되면, 몇 분만 지나도 안 할 말과 행동을 하게 되지요. 하지만 벌컥 화를 내버리는 게 앙심을 품고 꽁해 있는 것보다 나을 때도 있습니다. 꽁해 있다 보면 자기 속만 썩어 들어가니까요.'(193쪽) 


할머니가 직접 써내려간 책 속에 그려진 그녀의 삶은 화려하거나 거창하지 않다. 오히려 마치 우리네 인생처럼 그저 매일에 충실하고 변하는 계절에 순응하며 그 안에서 기쁨을 찾는 소박한 일상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따뜻한 그림과 삶에 대한 믿음 그리고 진취적인 자세는 동시대를 넘어 지금까지도 우리 곁에 생생히 남아 희망이 되고 있다. 


늘 누군가의 도움에 기대기보다 제힘으로 살아내고 싶었다는 모지스 할머니. 이 책을 통해 그녀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다시금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을 용기와 위로를 얻을 수 있다. 


모지스 할머니 그림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에 비해 늦은 나이에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다는 사실 외에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할머니 특유의 서정적이고 매력적인 글들은 세련되진 않지만 솔직하고 재미있고, 달콤하다. 여기에 그녀만의 아기자기하고 따뜻한 작품이 더해 보는 맛까지 더했다. 


책에서는 먼저 할머니의 어린 시절이 펼쳐진다. 제대로 된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고, 생일이 무언지 알지 못한 채 그저 여동생의 요람을 흔들고, 숲속에서 꽃을 꺾으며 지낸 행복한 일들부터, 12살에 가정부가 되어야 했던 힘든 시절을 회상한다. 


이어 남편인 토마스 모지스와 결혼해 남부 지역으로 터를 옮기는 여정부터 시작이다. 열 명의 아이 중 살아남은 다섯 아이들을 살뜰히 키우며 바지런히 보낸 그녀를 만날 수 있다. 


이후 그녀는 다시 북부로 돌아간다. 자녀들을 모두 결혼시키고, 비로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경험한 일들로 채워져 있다. 


'이튿날인 5월 15일 일요일에는 트루먼 여사가 우리를 블레어하우스로 초대해 차를 대접해주었습니다. 차를 다 마셔갈 무렵 요란하게 천둥 번개가 치는 바람에 모두들 소파에 앉아 비가 그치길 기다렸어요. 옆에 앉은 트루먼 대통령이 내게 “이 건물은 워낙 커서 피뢰침이 많으니 겁먹지 마세요”라고 하더군요. 이 할머니가 겁먹을까봐 걱정이 되었나 봅니다.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꼭 내 아들 같더군요. 나는 피아노 한 곡을 연주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피아노를 연주해주었는데, 참 듣기 좋았습니다.'(268쪽) 


라디오 출연부터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상을 받게 된 이야기까지 흥미로운 나날들이 이어진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얼마 안 돼 미국 전역이 들썩거렸다. 온갖 생활용품에 할머니의 그림이 녹아들었고, 그녀의 그림이 들어간 크리스마스카드는 1억여 장이나 팔려나갔다. 


하지만 이런 열풍에도 그녀는 담담히 말한다. “늘그막에 찾아온 유명세나 언론의 관심에 신경을 쓰기에는 나는 나이가 너무 많아요. 그보단 다음에 어떤 그림을 그릴지 생각합니다.”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은 그녀의 인생과 닮아 있다. 본인의 삶을 하나하나 추억하며 기록하듯이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ㅣ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ㅣ수오서재

'시럽 만들기'에는 눈이 소복이 쌓인 숲에서 단풍나무 수액을 받아 시럽을 만들던 어린 시절이, '사과 버터 만들기'에서는 밤이 깊어지도록 온 가족이 놀이하듯 버터를 만들던 하루가, '오래된 오크 양동이'에는 그 시절 유행한 노랫말과 마을 전설이 녹아 있다. 


'내가 만약 그림을 안 그렸다면 아마 닭을 키웠을 거예요. 지금도 닭은 키울 수 있습니다. 나는 절대로 흔들의자에 가만히 앉아 누군가 날 도와주겠거니 기다리고 있진 못해요. 주위 사람들에게도 여러 번 말했지만, 남에게 도움을 받느니 차라리 도시 한 귀퉁이에 방을 하나 구해서 팬케이크라도 구워 팔겠어요. 오직 팬케이크와 시럽뿐이겠지만요. 간단한 아침 식사처럼 말이에요. 그림을 그려서 그렇게 큰돈을 벌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늘그막에 찾아온 유명세나 언론의 관심에 신경 쓰기에는 나는 나이가 너무 많아요.'(272쪽)


책 속에서 사랑스러운 그림과 그녀의 소박한 삶이 맞닿아 우리에게 다가올 때 비로소 우리는 알 수 있다. 한치 앞도 모를 인생이지만 아직은 살아볼 만하다고,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다는 사실을. 


한주연 기자

Posted by have a Good story, gdaily 지데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