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세계 각지의 고질적인 기아를 종식시킬 수 있는 지식과 도구 자원을 가지게 된 지 40년이 넘었다. 식물 육종가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노먼 볼로그가 시작한 녹색혁명은 20세기 기술이 이뤄낸 기적으로 불리며 아시아가 경제 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폭제가 됐다.


사진_기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ㅣ로저 서로우, 스코트 칼맨 지음ㅣ이준수 옮김ㅣ에이지21 펴냄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선 이 시점에도 하루에 2만5000여명, 일 년에 600여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기아와 영양실조, 기타 관련 질병으로 사망하고 있다. 더구나 영양실조로 죽은 아프리카인들의 수가 에이즈와 말라리아로 죽은 아프리카인들을 합친 수보다 많다. 더불어 2008년 식량 위기를 겪으면서 기아를 정복했다고 착각했던 세계는 자만의 엄청난 대가에 휘청거렸다. 중요한 것은 이 일들이 앞으로 더 좋지 않은 상황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경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늦봄의 타는 듯한 무더위 속,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앞으로 일어날 더 심각한 일의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그 누구도 깨닫기 전, 한 작은 소녀가 국제 구호 캠프를 향해 비틀거리며 돌밭을 걸어오고 있었다. 소녀의 얼굴 여기저기에는 파리들이 들러붙어 눈, 코, 입의 물기를 핥았다. 소녀는 때가 꼬질꼬질 묻고 다 늘어진 남루한 회색 원피스를 걸친 채 맨발로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이제 겨우 여덟 살이었지만 등에 여동생을 없고 있었다. 소녀는 말할 기운도 없는지 아무 말 없이 한 손으로 다른 한 손을 받치고 힘없이 두 팔을 내밀었다. 겁에 질린 소녀의 검은 눈동자는 필사적이었다. 소녀의 두 눈은 제발 뭐든지 먹을 것을 좀 달라고 애원했다. 기아 상황에서 굶주린 사람들은 눈으로 말한다.:::


≪기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아프리카와 개발, 농업 등을 주제로 한 기사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은 <월 스트리트 저널>의 특파원인 로저 서로우와 스코트 킬맨가 철두철미한 조사를 통해 기아에 대한 서방 세계의 편견과 오류들을 꼼꼼하게 짚어낸 결과물이다.

이 책은 단순히 문제를 제기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 기아 지대와 세계은행에서부터 미국 농업 가정의 주방 식탁에까지 직접 현장을 뛰어다니면서 얻은 방대한 취재 결과를 바탕으로 한 현실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왜 이렇죠?”

“이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거죠?”

“이 사람들은 죽었나요?”

 

기아를 단순히 가뭄 같은 자연재해나 전쟁, 부패한 지도자 때문이 아니라 정치 영역 전반에 걸친 잘못된 정책의 결과로 인식한 지은이는 실질 조사와 실제 인물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를 바꾸어놓은 농업혁명이 아프리카에서는 왜 갑자기 중단됐는지, 무지와 방치를 오가는 이른바 선의의 전략이 어떻게 세계의 극빈층을 계속 굶주리게 했는지, 또 어떻게 이들을 자급자족할 수 없게 만들었는지 설명해나간다.


지은이는 책에서 우선 기아 문제에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막강한 집단에 맞서 다음의 비판점들을 제기한다. ▲원조 공여자들의 이익을 원조 수혜자들의 이익보다 우선시하는 식량 원조 산업 ▲미국 및 유럽 농민들이 국제 무역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게 해주고 아프리카 농민들은 대외 원조에 지속적으로 의존하게 만드는 농업 보조금 ▲식량 위기가 고조되는 시점에도 점점 더 많은 식량을 비경제적 연료로 전환시키는 에탄올 인센티브 ▲자신들은 수용할 수 없는 경제 치유책을 아프리카에는 수용할 것을 위선적으로 강요하는 서방 공여국과 정치인들 ▲자국에 도입해 이익을 본 현대 농법에 반감을 가지고 아프리카 농민들의 도입을 방해하는 사회 운동가들 ▲기아를 전쟁의 무기로 이용하며 국민들의 부를 갈취하는 아프리카 지도자들 등이 그것이다.


:::자연재해는 일어나기 마련이고, 비양심적인 독재자는 나라를 망치기 마련이다. 그러나 현재 만연해 있는 만성적인 세계 기아의 많은 부분은 인간이 만들어낸 재해, 즉 자기 자신이나 당시 아프리카를 위해 가장 좋다고 생각되는 일을 하는 사람들과 단체들, 정부들에 의해 하루에 하나씩, 한 번에 하나씩 이루어진, 다시 말해 익명의 결정으로 생긴 인재이다.:::



지은이는 “지금 이 세대야말로 지금까지 끊임없이 인류를 괴롭혔던 기아라는 재앙을 마침내 종식시킬 수 있는 세대”라고 주장하며, 기아 퇴치를 위해 이념과 정치, 계급을 막론하고 힘을 모으고 있는, 지금까지 유례가 없던 움직임에 대해 이야기한다.


책엔 기아 종식을 위해 발을 벗고 나선 종교인들, 아프리카 기업가들, 미국의 농업인들, 전직 대통령과 수상, 빌 게이츠와 하워드 버핏 등 자선사업가들, 아일랜드 록스타와 정치인들, 미국의 평범한 주부와 기업 간부들의 생생한 목소리도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