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냇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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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꽃보다 붉은 울음>詩냇가 2014. 1. 6. 09:54
눈 나리는 날 아침에 정월 초하룻날 설날이 되었다잠에서 눈을 떠창문을 열고 보니 폭설이 내려서온 바다를 흰눈이 덮었고은빛 찬란함이눈부시도록 아름다웠더라. 눈 나리는 날에 가장 좋아하던우리 집 바둑이는 천지를 돌아다니며뒹구르며 좋아하며 짖는 그 소리가노래같이 들리더라너무나도 신기하고 놀랍더라. 장독 위에는 소복소복 쌓인 눈이연꽃같이 희고 아름다웠더라대밭의 댓잎에서는 흰눈이소복소복 쌓여서 칼끝과 같이쪼삑쪼삑 하였더라. 소나무에도 많은 눈이 쌓여서목화같이 보이기도 하고눈꽃같이도 아름다웠고좋게 보이더라. 우리 집 지붕 끝에는 고드림이 주렁주렁 매달려서보기에 경치가 좋았더라. 나는 설날의 음식과 떡국으로 차려서아랫마을의 할머니 집으로세배를 나섰더니 눈 속에서길을 몰라 헤맬 때바둑이가 내 앞에 뛰어와서길을 인도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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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시집]詩냇가 2013. 10. 5. 08:36
‘높은 곳으로 가라, 골짜기로 가라!’ 한밤중 깊은 전나무 숲 속에 퇴색한 달빛이 나뭇가지 사이로 두려움에 떨며 미소 지을 때 나는 홀로 쓸쓸히 서 있는 너를 보았네. 아무 소리도 없다. 가벼운 바람이 골짜기에서 살금살금 불어와 머무네. 맑게 부딪히는 갈대 소리는 오싹할 정도로 부드러워 마치 늪지에서 솟아난 망령의 속삭임처럼 울린다. 굳게 쥔 두 주먹과 타오르는 눈동자 거친 바위벽에 속박당한 채 네 마음은 거센 파도처럼 고동치며 해변을 향해 끊임없이 물결을 토해낸다. 부서진 성벽의 흔적, 돌기둥의 화려함 환한 달빛 아래 성벽은 움푹 팬 눈동자로 그를 경멸하며 일그러진 입술로 고개 숙여 절하며 말한다. ‘높은 곳으로 가라, 골짜기로 가라! 태양은 살육 당하고 달은 생명을 얻었다. 너는 빛바랜 창백한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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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아버지 학교>詩냇가 2013. 6. 3. 14:58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수염이 검어졌습니다. 양날면도기가 차갑게 턱 선을 내리긋고 지나갔습니다. 살이 뜯겨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두 번째부터는 손쉬웠습니다. 한 면은 거칠었고 한 면은 잘 들었기 때문입니다. 날 선 쪽으로 삭삭, 두어 번 베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도루코 면도날을 반쪽만 잘라 엇갈아 끼우셨습니다. 아버지는 무딘 쪽만 쓰셨습니다. 면도기를 함께 쓰다니, 다 컸구나. 기념으로 소주도 몇 잔 받았습니다. 잘 드는 쪽이 네 거다. 아버지의 마음 한쪽을 상속받았습니다. / 중 ‘면도기’ 트위터 @gdaily4u 자료도움 gdaily4u@gmail.com 아버지 학교저자이정록 지음출판사열림원 | 2013-05-13 출간카테고리시/에세이책소개어머니 연세에 맞춤하여 72편으로 써낸 『어머니학교』, 이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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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어머니 학교>詩냇가 2013. 5. 20. 18:24
노각이나 늙은 호박을 쪼개다 보면 속이 텅 비어 있지 않데? 지 목 부풀려 씨앗한테 가르치느라고 그런 겨. 커다란 하늘과 맞닥뜨린 새싹이 기죽을까 봐, 큰 숨 들이마신 겨. 내가 이십 리 읍내 장에 어떻게든 어린 널 끌고 다닌 걸 야속게 생각 마라 다 넓은 세상 보여주려고 그랬던 거여. 장성한 새끼들한테 뭘 또 가르치겄다고 둥그렇게 허리가 굽는지 모르겄다. 뭐든 늙고 물러 속이 텅 빈 사그랑주머니를 보면 큰 하늘을 모셨구나! 하고는 무작정 섬겨야 쓴다. - 「사그랑주머니-어머니학교 1」 중에서 어머니 학교 저자 이정록 지음 출판사 열림원 | 2012-10-25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어머니학교는 시인의 학교며 시인학교다!이정록 시인의 시집 『어머... @gdaily4u 님의 트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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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세 명의 시인 <시인이 시를 쓰다>詩냇가 2013. 3. 22. 16:42
국수가 먹고 싶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 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 이상국 '국수가 먹고 싶다' 중에서 시인이 시를 쓰다저자마흔세 명의 시인 지음출판사지식을만드는 지식 | 2012-01-10 출간카테고리시/에세이책소개새로운 시의 시대를 여는 「지식을만드는지식 육필시집」 시리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