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식의 나라 프랑스, 그곳에서 '먹고살기'카테고리 없음 2018. 7. 18. 10:17
낭만과 투쟁이 공존하는 나라, 패션과 예술의 도시. 프랑스와 그 수도 파리를 말할 때 쓰는 흔한 표현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사여구들과는 별개로 파리는 다양한 인종의 구성원들이 매일의 일상을 살아가는 대도시다.
프랑스는 체제 전복과 왕조 교체, 산업혁명과 전쟁을 겪으면서도 다채로운 음식문화에 대한 욕심만은 버리지 못했던 나라다. 종교개혁과 시민혁명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에도 오히려 시민이 나서 귀족의 식탁을 장식하며 음식문화의 전통을 유지하고 발전시킨 곳이다.
“당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프랑스의 저명한 미식가 브리야 사바랭의 이 말은 단순히 배가 고플 때 먹는 음식의 의미를 넘어, 음식이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주는 ‘삶’ 그 자체라는 것을 나타낸다.
여기 프랑스에서 18년간 살았고, 프랑스인과 결혼했던 한 여성이 있다. 과거 전기밥솥이 못내 아쉬웠던 열아홉의 한국인 유학생었던 곽미성 작가에게 지난 시간은 먹는 문제만큼 사람을 외롭게 하는 일도, 품격 있게 만드는 일도 없음을 깨닫는 시간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음식을 통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여실히 확인했지만, 또한 음식을 통해 서로의 국경을 쉽게 넘어서기도 했다. 곽미성 작가의 <외로워서 배고픈 사람들의 식탁>은 자국민과 이방인, 수용과 혐오,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때우는 끼니와 고급 레스토랑에서의 미식, 그 경계선이 그어지는 공간이자 그 경계선을 지우고자 하는 장소로서 식탁들을 그리고 있다.
“탐욕스러운 사람들은 대부분 망명객이거나 영구 국외거주자입니다.”
<뉴요커> 전속작가 애덤 고프닉의 이 말처럼, ‘집밥’을 먹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한 끼 한 끼는 너무나 중요해서 그들 고유의 성향을 뒤흔들어 놓고는 한다.
집밥을 먹을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은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며, 현실에 단단히 발을 딛고 서 있기보다 공중에서 부유하듯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특히 그들은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사람들이다.
곽미성 작가가 먹는 풍경에 주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방인 여성으로서 그는 프랑스 미식문화의 정점이라고 여겨지는 미슐랭과 이를 둘러싼 문제들에 민감했고, 이슬람교도 학생들을 위한 급식 메뉴가 공급 중단된다는 뉴스를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2015년 부르고뉴 지방의 샬롱쉬르손(Chalon-sur-Saône)에서 앞으로는 초등학교급식에서 돼지고기 대체 메뉴를 제공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프랑스의 급식 메뉴는 지방자치단체의 재량으로 정할 수 있고, 1984년부터 이 지역에서는 이슬람교도 학생들을 위해 돼지고기 대체 메뉴를 제공해 왔다. 프랑스 내 이슬람교도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2.5퍼센트를 넘어선 상황에서 이슬람 율법에 맞 는 할랄halal 메뉴는 아니더라도 이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시스템으로 오랫동안 운영되어 왔다. 그런데 2011년, 2013년에 면 단위 자치단체에서 예산 부족을 이유로 대체 메뉴 중단을 결정했고, 2015년 3월에는 샬롱쉬르손의 질 플라트레(Gilles Platret) 시장이 문제제기를 하고 나선 것이다. 그는 “학교 급식이 종교적 배려까지 할 수는 없습니다. 돼지고기가 나올 때마다 대체 메뉴를 제공함으로써 학생들 사이에는 차별이 발생하는데, 이는 세속주의 공화국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주장했다. 초등학교 급식 식당에서 돼지고기를 먹는 학생과 안 먹는 학생이 나뉘는 것은 세속주의 국가의 원칙에 반한다는 얘기다. 이슬람문화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그 어느 때보다 예민하던 시기였고, 찬반 여론이 들끓었다. 공화당, 국민전선의 정치인들은 속속들이 지지 의견을 내놓았다.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은 전당대회 연설에서 “급식에 햄과 감자튀김이 나왔다면 햄을못 먹는 대신 감자튀김을 두 배로 더 먹으면 되겠네요. 그게 바로 공화국입니다"라며 지지 발언을 했다. 반면 당시 사회당 정권의 교육부 장관이던 나잣 발로벨카셈은 분별력 있는 결정을 호소했다. “종교에 따라 먹을 수 없는 음식이 정해져 있는데 이를 급식에서 없애는 결정은 현실적으로 특정한 학생들을 학교 식당에 금지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샹롱쉬르손의 이슬람교도 어린이들은 돼지고기가 나오는 날에는 알아서 끼니를 때우게 됐고, 다른 지역의 보수 정당 출신 시장들도 뒤를 이어 돼지고기 대체 메뉴를 없앴다. 그중 국민전선의 한 시장은 놀라운 논리를 펼쳤다. “저는 평등, 박애, 자유의 국가적 표어를 존중합니다. 급식 메뉴에서의 평등, 프랑스 돼지 사육자들에 대한 박애, 그리고 불만이 있다면 다른 데 가서 먹을 수 있는 자유를 말입니다.”... 모든 선거가 끝난 2017년 8월, 디종 법원은 샬롱쉬르손의 대체 메뉴 제공 중지 결정에 “폐기”를 판결했다. 법원의 판결 이유는 간단했다. “이 결정은 아동인권에 대한 국제협약과 가장 우선적인 아이들의 이익에 반한다.”'(57~59쪽)
또 자신에게 와인 선택과 시음의 기회를 주지 않는 레스토랑 직원 때문에 감정이 상했고, <르 푸딩>에 한국인 여성 셰프가 소개되자 무척 기뻤으며, 프랑스인 남편과 입맛이 달라 어쩌냐는 주위 사람들의 걱정이 얄밉기만 했다고 한다.
이 책에는 이방인이기에 더 생생하게 감각할 수 있었던 서른 개 식탁의 현장이 담겨 있다. 우리는 누구나 서로에게 이방인이고 미각은 어디에서나 통하는 언어라는 점에서 가장 쉬운 언어로 쓰여진 우리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에어프랑스는 가족과 아이들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2018년 2월 에어프랑스는 이러한 입장 표명을 했다. 말레이시아 항공, 에어아시아에서 시행 중인 비행기 안 ‘노 키즈 존’에 대해 단호하게 반대 의사를 밝힌 것이다.
프랑스 주간지 <르 푸앙(Le Point)>의 2016년 기사에 따르면, 성인만 입장 가능한 호텔은 전 세계에 682곳 있고, 그중 375개는 유럽의 지중해 연안에, 40여 곳은 독일에 있다. 프랑스에는 두 곳이 있다. 프랑스에서 노 키즈 존 이슈는 매체의 주목을 받지 못할 만큼 요원한 주제이고, 나치 시절 유태인이 연상될 정도로 차별금지법 위반의 소지가 다분한 문제로 꼽힌다.
2017년에 프랑스에서는 'Women Do Wine'이라는 단체가 만들어졌다. 생산부터 판매, 홍보, 유통까지 와인업계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결성한 단체다. 이들의 취지는 그동안 남성 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와인업계의 균형을 바로잡고, 여성의 영역을 확대해 나가는 데 있다.
인터넷에서 프랑스 레스토랑에 대한 불만도 자주 목격된다. 프랑스 레스토랑은 남성과 여성이 함께 있는 테이블에서 와인 선택과 테이스팅의 기회를 주로 남성 고객에게 부여하는데, 이를 두고 여성 소비자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남성이 선택해 주는 와인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맛을 보고 고른 와인을 마시고 싶다는 여성들의 목소리인 것이다.
식탁의 영역은 정치외교 분야로도 확장된다. 1995년부터 2007년까지 재임한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매년 농업박람회를 방문해 하루 종일 머물며 잘 먹고 잘 마시는 갈리아인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연출했고, 지금까지도 프랑스 사람들은 그를 가장 국민 친화적인 대통령으로 꼽는다.
사르코지 전 대통령은 프랑스 치즈를 좋아하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의 만찬에 평소보다 두 배 분량의 치즈를 준비했다. 훗날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과의 만찬을 45분 만에 끝내며 그는 이렇게 투덜댔다고 한다. “이렇게 짧은 식사가 좋지 않아요? 앙겔라는 먹는 걸 너무 좋아해서….”
<외로워서 배고픈 사람들의 식탁> 곽미성 지음(어떤책)
'프랑스는 여전히 다른 나라에 비해 여러 명이 모여 오랫동안 나누는, 식사를 즐기고, 식사 위주로 사회적 관계를 만들고 있다. 영미권에 비해 프랑스 사람들이 많이 먹으면서도 살찌지 않는 이유는 천천히 먹고, 오래 먹고,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많이 마시는 식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내가 불편한 같이'보다는 '마음 편한 혼자를 더 즐기게 되면서 군살도 함께 늘었던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나보다. 아무리 날씬해지는 비결이 그 안에 있다고 하더라도 무조건여럿이 함께하는 식사가 혼자 하는 식사보다 낫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함께하며 스트레스 받고 괜히 머릿속 복잡해지는 식사보다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나만의 식사가 훨씬 매력적이다. 그럼에도 작은 일이라도 마음과
생각을 펼쳐 보이고 세계와 소통하는 방식의 삶이 훨씬 건강하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마음 편히 함께 식사도 할 수 있는 관계가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늘지 않고 있음을 생각하면 살짝 위기감이 느껴지기도 한다.도대체 함께하는 식사는 왜 이렇게 특별하고 어려운 일이 됐을까? 내게도 식사는 그저 위장을 채우는 일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식사는 함께 먹는 상대와 생각을 나누고 마음을 열어 보여야 이룰 수 있음을 의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같이 밥한 끼 먹는 게 뭐 그리 대수냐고 생각했던 20대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열려 있었고, 편견 없이 세상을 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문제는 예의와 존중이라고 볼 수도 있다. 프랑스에서 식사문화가 발달했다는 사실은 예의와 존중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의미이기도 하지 않을까? 식탁 위의 규율은 결국 서로를 존중 하고 배려하는 기술'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 기술이 자연스럽 게 몸에 배어 서로 불편할 일이 없다면, 그렇게 소통하는 식탁은 혼자 먹는 평화와는 비할 바 아닌 커다란 즐거움일 것이다.'(204~205쪽)<외로워서 배고픈 사람들의 식탁>은 이처럼 미식의 나라 프랑스에서 자기 인생의 절반을 산 곽미성 작가가 이방인으로서 세상을 마주하는 생각과 느낌을 가감없이 전해주고 있다.지데일리 정용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