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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플린vs히틀러' 세기의 콧수염 대결, 뜨거운 막판 신경전문화 2017. 9. 13. 14:24
[HISTORY in]
찰리 채플린과 아돌프 히틀러. 20세기에 가장 사랑받은 남자와 가장 미움받은 남자.
<채플린과 히틀러의 세계대전> 오노 히로유키 지음ㅣ양지연 옮김ㅣ사계절 펴냄
똑같은 콧수염을 길렀지만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던 이 둘 사이에는 불과 4일 차이로 태어났다는 우연과 예술가를 꿈꿨다는 공통점, 두 사람 모두 쇼펜하우어의 애독자였다는 자잘한 가십에 이르기까지 화제가 끊이지 않는다.
혹자는 이 두 천재의 관계를 ‘20세기의 빛과 그림자’로 비유하기도 했다. 그런데 히틀러에게는 총알과 포탄이 난무하는 전선만큼이나 중요한 또 다른 전쟁터가 있었으니, 미디어 전쟁이다. 채플린과 히틀러는 미디어라는 전쟁터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전투를 벌인 인물이다.
<채플린과 히틀러의 세계대전>은 영화 〈위대한 독재자〉의 상세한 제작 과정을 좇으며, 이 문제작을 둘러싸고 벌어진 거대한 싸움을 추적해나간다.
저자인 오노 히로유키는 채플린가에 보관된 메이킹 필름과 채플린이 직접 남긴 1만 쪽에 달하는 메모, 제작 일지, 편지, 당시의 신문 기사, 독일연방 영화 아카이브와 뮌헨 현대사연구소에 남겨진 제3제국 기록물 등을 꼼꼼히 확인한 끝에 2차 세계대전 개전 전후에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거대한 미디어 전쟁을 복원할 수 있었다.
화가가 되기를 꿈꾸던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인해 민족적 자부심이 좌절된 청년기를 통과하며 극단적인 반유대주의자가 됐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군비가 제한되고 거액의 배상금에 허덕였으며 미증유의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당시 바이마르공화국의 국민들은 전후 강대국에 의해 강요된 민주적 질서보다 제정의 복권을, 그리고 전쟁의 활기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이 흐름에 성공적으로 올라탔다. 1919년 10월 16일 열린 독일노동자당 공개 집회에서 연단에 오른 히틀러는 그 자리에서 쌓이고 쌓인 울분을 거침없이 토해냈다. 이 일로 히틀러는 정치적으로 주목을 받게 되고 다음 해 독일노동자당의 당명을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으로 변경하고 당수로 취임했다.
1923년 뮌헨 폭동을 주도한 혐의로 투옥되는 등 부침을 겪기도 했지만, 1920년대를 거치면서 히틀러는 정치적으로 꾸준히 성장해나갔다.
이 과정에서 히틀러의 힘을 배가시킨 무기가 바로 미디어다. 그는 정치에 입문한 초기부터 미디어의 힘에 주목하고 독자적인 집회와 선전 방식을 고안했다. 히틀러는 가상의 적을 만들어 끊임없이 투쟁 상태를 연출하고 사람들을 흥분 속에 가둬두는 일,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기대감을 품게 만드는 일에 특출했다.
그의 선전술은 순식간에 뮌헨을 휘어잡았다. 하지만 혼자만의 활동으로는 그 기세를 독일 전역에 퍼뜨리기에 한계가 있었다. 이에 1926년 나치는 연설가 학교를 설립해 연설 기술을 연마한 히틀러의 분신을 양성했다.
이후 유성영화가 발명되자 나치의 선전장관인 괴벨스는 히틀러의 연설 영상을 전국의 모든 영화관에서 영화 시작 전에 반드시 상영하도록 명령했다.
이처럼 미디어를 활용한 선전, 선동 활동은 히틀러의 권세를 확립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그 결과 1933년 총선이라는 합법적 절차에서 국민의 압도적인 동의를 얻어 일당독재 체제, 나치 독일이 수립된다.
영국 뮤직홀 무대에서 연예계에 입문한 찰리 채플린은 미국 순회공연 도중 할리우드 영화계에 발탁됐다. 1914년 2월 2일 개봉한 〈생활비 벌기〉로 데뷔한 뒤 같은 해에만 35편의 영화에 더 출연하며 순식간에 미국 영화 산업을 점령했다.
채플린의 영화는 곧 유럽에서도 큰 사랑을 받게 되는데, 1차 세계대전의 참화 속에서 병사들은 채플린의 영화를 보면서 삶의 희망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아울러 채플린이 1918년 종전을 얼마 앞두고 제작한 영화 〈어깨총〉은 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참호전의 실상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이제껏 유례없는 반전(反戰)영화로 기록됐다.
1921년 제작한 첫 장편 영화 〈키드The Kid〉도 1차 세계대전 직후 고아가 급증했던 당대 현실을 비추며 관객들에게 큰 울림을 남겼다.
그런데 〈키드〉는 뜻밖에도 미디어 전쟁의 방아쇠를 당기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영화가 전 세계 50여 개국에서 상영되면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전 세계적인 매체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이로써 채플린과 히틀러 사이의 총성 없는 전쟁이 시작된다.
채플린을 향한 나치 독일의 공격은 집요했다. 1926년 채플린의 대표작 〈황금광 시대The Gold Rush〉는 독일 당국의 검열로 일부 장면 삭제 조치를 당했으며, 나치는 “채플린은 유대인”이며 “〈황금광 시대〉는 안이한 모방작”이라고 비난했다.
이 시기에 이미 독일 대사관은 미국과 유럽에서 〈어깨총〉이 상영되지 못하도록 실력행사를 하기 시작했다. 영화라는 미디어를 통치 시스템의 기반으로 삼은 나치가 채플린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배제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우선 채플린이 유대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채플린의 혈통에는 유대인의 피가 흐르지 않았지만, 어쨌든 나치는 그렇게 믿었다.
다음으로 독일 내에서 채플린의 인기가 히틀러의 인기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용지에 ‘채플린’이라고 쓴 사람까지 나올 정도로 ‘평화주의자’ 채플린의 정치적 상징성이 대단했다.
마지막으로 결정적이며 특별한 이유가 바로 ‘콧수염’이다. 독일에서 지도자의 콧수염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빌헬름 2세, 비스마르크,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멀리 거슬러 올라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까지 모두 개성 있는 수염을 길러 지도자로서의 위엄을 표현했다.
히틀러 역시 개성 있는 수염을 길렀지만, 하필이면 그 콧수염의 생김새가 희대의 익살꾼 ‘방랑 신사 찰리’의 그것과 똑같았다. 유대인 희극 배우와 똑같다는 이유로 콧수염을 밀어버릴 수는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그대로 두면 풍자의 대상이 돼 정치적 권위가 흔들릴지도 몰랐다.
이에 나치의 공세는 채플린의 영화에만 그치지 않고 1933년 채플린이 등장한 엽서의 판매 금지, 1935년 채플린에 관한 서적의 판매 금지, 1936년 채플린과 그의 영화에 대한 기사와 논평마저 완전히 금지하기에 이른다.
상영 금지, 논평 금지, 콧수염 금지, 소송전, 나아가 웃음까지 통제하는 나치의 이미지 전략은 국가 통치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아울러그들의 전략을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은 바로 채플린이었다.
채플린은 〈위대한 독재자〉를 준비하기에 앞서 유럽을 지배했던 독재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영화화해 전 세계에 퍼져가고 있는 파시즘의 위협을 경고하려 했다.
‘나폴레옹 프로젝트’로 불리는 이 기획은 채플린이 진짜 나폴레옹과 가짜 나폴레옹 1인 2역을 한다는 점, 독재자를 통해 세계의 위기를 드러내고 평화를 호소하는 정치 영화였다는 점 등에서 〈위대한 독재자〉의 전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채플린은 ‘평화와 반전’이라는 시대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달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이 프로젝트를 중단했다. 점점 더 고조되는 전쟁의 분위기 속에서 평화를 쟁취하기 위한 더욱 확실한 무기가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1937년 어느 날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영화사의 프로듀서인 알렉산더 코르다로부터 방랑 신사 찰리와 독재자 히틀러가 모두 똑같은 콧수염을 기르고 있으니, 이 점을 모티브로 영화를 만들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곧바로 채플린은 히틀러를 풍자하는 영화를 제작할 생각에 사로잡혔다.
초기에 ‘프로덕션 6’으로 알려진, 곧 〈위대한 독재자〉라 명명될 바로 그 영화이다. 마침내 1937년 10월 9일에 ‘프로덕션 6’ 신작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1938년 12월까지 조수 댄 제임스와 함께 영화의 스토리를 정리한 채플린은 1939년 1월 드디어 완성된 시놉시스를 들고 촬영장으로 향했다.
〈위대한 독재자〉의 제작 소식을 들은 나치는 채플린을 더욱 거세게 공격했다. <쿠리에>와 <앙그리프> 등 나치당의 기관지들이 앞장섰으며, 독일 대사관도 채플린의 차기작은 명백히 히틀러를 풍자하는 영화라면서 이 영화의 제작을 무산시키라고 미국 정부를 압박했다.
이에 더해 당시까지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과 미국 정부도 이 영화의 제작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채플린은 거침없이 촬영 준비에 돌입했다.
1940년 10월 10일, 제작 기간 559일, 촬영기간 168일, 사용 필름 47만7440피트, 완성본 필름 1만1625피트, 제작 비용 140만3526달러가 든 〈위대한 독재자〉는 개봉을 닷새 앞두고 마침내 완성됐다.
미국에서 전년도의 초대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능가하는 흥행을 기록한 것은 물론, 이미 전화에 휩싸인 영국에서는 국왕 조지 6세가 개봉 당일에 영화를 관람하고 찬사를 보내는 등 온 국민이 열광했다. 한 언론은 “런던이 독재자 채플린에게 정복당했다”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과연 히틀러는 자신을 풍자하고 위기에 빠뜨린 이 영화를 보았을까. 저자는 몇 가지 증거들을 들어 히틀러가 이 영화를 보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런데 히틀러가 〈위대한 독재자〉를 보았는지 안 보았는지보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개봉된 후 히틀러의 연설 횟수가 격감했다는 사실이다. 마치 희극왕이 희대의 연설가에게서 그 무기를 빼앗아온 듯이 말이다.
1932년 정권 탈취를 위해 비행기를 타고 하루에도 서너 곳을 방문하며 연설하던 선동가는 〈위대한 독재자〉가 개봉한 다음해인 1941년에는 불과 7회, 1942년에는 겨우 5회만 대중 연설에 나섰다. 괴벨스는 히틀러에게 거리로 나가서 국민을 고무하라고 요청했지만 총통은 자신의 이미지가 조롱당할 것을 두려워하며 더 이상 전선 시찰을 하지 않았다. 그때서야 중요한 것은 ‘내용’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결국 히틀러는 연합국의 포탄이 베를린 시내를 뒤덮던 1945년 4월 30일, 지하 방공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독재자의 황당한 야망은 무너지고 채플린의 웃음만 남은 것이다.
지데일리 한주연 기자
gdaily4u@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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