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디자인] 


공공기관의 한 장짜리 서류 양식에서부터 책, 인터넷 사이트, 편의점 상품의 패키지, 스마트폰, 책상 위의 모니터, 식당의 의자와 테이블, 버스와 전철의 인테리어, 도로의 사인, 가로등, 고층건물의 외관, 공중 화장실의 세면대, 아파트의 벽지와 전등 스위치….


<시각디자인> 리카르도 팔치넬리 지음ㅣ윤병언 옮김ㅣ홍디자인 펴냄.


기업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개인의 일상에 이르기까지 우리 생활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디자인. 디자인은 우리가 아침에 눈을 떠서 잠들기 전까지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과 관련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각디자인>은 디자인의 역사를 500여 년으로 확장해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디자인 역사를 모더니즘 이후 100년 정도로 보는 대부분의 디자인 책들과는 다르다. 


때로는 로마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고대 문화와 현대를 비교 관찰해 보여 주기도 한다. 마치 인문학 고전이 현대의 문제를 새롭게 조명하듯이 디자인을 보는 새로운 재미와 눈을 열어 준다. 


'디자인은 도처에 널려 있다. 현대인은 누구나 디자인을 이용하거나 즐길 수 있고 착취하거나 낭비하거나 파괴하거나 재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두워서일까,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은 바로 우리가 눈으로 디자인을 바라본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이  다루는 내용이다. 비주얼디자인의 언어, 즉 시선에 포착되기 위해 만들어진 모든 것에 대한 앎이 이 책이 다루는 내용이다. …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것이 비주얼디자인이다. 많은 사람들이 대기업의 로고에서부터 컴퓨터나 휴대전화의 프로그램, 광고, 책표지 혹은 뮤직비디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디자인을 식별할 줄 안다. 그러나 비주얼디자인은 대규모의 커뮤니케이션 본야에서만 등장하지 않는다. 하다못해 속옷의 세탁표시도 얼마든지 비주얼디자인의 영역에 포함될 수 있다. 가느다란 리본 위에 인쇄된 작은 글씨도 누군가에 의해 계획된 하나의 디자인이라는 사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기호나 아이콘, 적당히 어울리는 글씨체도 하나의 디자인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무시한 채 살아간다.'(11~12쪽)


이 책에 따르면 1524년 당대에 가장 위대한 판화가로 칭송받던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Marcantonio Raimondi, 1488~1534)가 교황 클레멘테 7세의 근위병들에게 체포되어 바티칸 감옥에 투옥된다. 소름끼치고 불순하기 짝이 없는 범죄의 주범으로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살인이나 도적질하고는 거리가 먼, 검은 마술이나 이단자들과도 상관이 없는 범죄였다. 모든 가능성을 검토한 뒤 내릴 수 있었던 유일한 결론은 그가 저지른 일이 이제껏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는 전혀 새로운 종류의 범행이라는 것이었다. 굳이 우리 시대의 용어를 빌어 표현하자면 그가 저지른 죄는 디자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사건은 만토바의 군주 페데리코 2세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테’ 궁전의 내부를 장식하기 위해 라파엘로의 총망받는 제자 줄리오 로마노(Giulio Romano, 1499~1546)에게 일련의 에로틱한 그림들을 의뢰하면서 시작된다. 


주로 사티로스나 요정같이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었다. ‘상세함’이 에로티즘과 포르노를 구분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면 로마노의 그림은 포르노가 틀림없다. 


그림 속에는 발기한 성기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성행위 자세(정확하게 열여섯 가지다)가 적나라하게 표현돼 있다. 


<이미지=홍디자인>


하지만 소수의 특권층이 포르노나 다름없는 그림들을 화가에게 청탁하는 것은 당시의 문화적 풍조였다.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 있었다면 누군가 그런 이미지들의 복사본을 대량으로 만들어 훨씬 더 많은 독자층에게 배포할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레이아웃이 무언인가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디자인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식탁 차리기를 예로 들어 보자. 접시들, 포크, 컵의 배치는 항상 스토리를 가지고 있으며 여러 가지 물건들이 배치되는 위치와 방식은 아주 정확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간편하게 차릴 수 있는 점심 식사에 맞는 방식이 있고, 중요한 손님들을 위해 극도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저녁 식사에는 또 다른 방식이 어울린다. … 본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을 의미하고, 누구든 자신이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게 마련이다. 한 폭의 정물화 앞에서 한 예술사가의 눈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였다면 요리사의 눈은 또 다른 방식으로, 한 아이의 눈은 더욱 더 다른 방식으로 움직일 것이다. 우리가 사물들을 관찰하는 방식은 천차만별이다. 어느 순간에 관찰하느냐에 따라, 개인의 능력에 따라, 문화적인 수준에 따라, 나이에 따라, 개인의 감정 상태에 따라 관찰 방식은 아주 다르게 변화한다.'(250, 253쪽)


'레이아웃과 관련해서 가장 무서운 습관은 글을 읽는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에서 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다. 어떤 상품의 효과를 보여주고 싶어하는 광고의 전형적인 형태가 이 습관을 토대로 만들어진다. 왼쪽에 하나의 현실적인 정보(지저분한 셔츠)를 제공하고 오른쪽에 새로운 현실(깨끗한 셔츠)을 소개하면서 공간을 둘로 나누고 오른쪽에서 벌어지는 일에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세제를 사용하는 장면). 이런 식의 광고가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레이아웃이 공간 안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형성되는 무언가라는 사실이다. 사각형 공간의 왼쪽에 있는 것은 이전을, 오른쪽에 있는 것은 이후를 뜻한다. 결국 이 공간에 도입되는 것은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인식이다. 왼쪽에 있는 것이 오른쪽에 있는 결과의 원인 된다.'(259, 261쪽) 


이 책의 저자인 리카르도 팔치넬리는 디자인 스튜디오 ‘falcinelli&co’의 대표로 일하며 디자인학교 ISIA의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친다. 디자인학과에서 ‘인지심리학’을 가르치는 이탈리아에서도 매우 독특한 선생이다. 


그는 이 책에서 ‘레이아웃’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예로 든 식탁 차리기, 피터르 브뤼헐의 ‘장님의 비유’ 등은 역사와 과학을 아우르는 그의 강의처럼 쉽게 와 닿는다. 


이 책은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세계를 다룬다. 디자인은 대기업 로고나 스마트폰 앱, 책 표지만이 아니다. 이 책은 오히려 속옷의 세탁표시에 주목한다. 


가느다란 리본 위에 인쇄된 작은 글씨도 누군가에 의해 계획된 하나의 디자인이라는 사실, 늘 사용하기 때문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기호나 아이콘, 글씨체도 하나의 디자인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옷은 명품이다. 멋지고 훌륭하지만 마치 조각처럼 모든 면에서 너무 완벽하기만 한 옷들이다. 한데 장을 보러 갈 때 입는 티셔츠를 만드는 일이 오히려 더 많은 고민을 안겨 주기도 한다. 


이 책은 그간 디자인에 대해 품었던 많은 고정관념들이 뒤집어지고 깨지는 경험을 선사한다. 다음은 저자 리카르도 팔치넬리와의 일문일답.


- 원서의 ‘우유팩’ 표지에 대해 설명한다면.

▲ 우리는 ‘문화’와 ‘상품’ 사이의 차이를 정의내리기가 상당히 힘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유팩처럼 슈퍼마켓에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상품의 디자인을 골라 그 위에 책 제목을 쓰고 그것이 동시에 책 제목이 되도록 배치한 거죠. 뭐랄까, 오늘날에는 책도 슈퍼마켓의 상품과 크게 다르지 않고 패킹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각디자인>의 저자 리카르도 팔치넬리. / 홍디자인 제공


- 디자인에 관한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계기는.

▲ 시각 커뮤니케이션의 세계를 디자인 전공자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설명해보고 싶은 욕심이 제게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매 순간 시각디자인으로 에워싸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온갖 종류의 티켓에서부터 냉동식품, 텔레비전 연속극에서 비디오 게임까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각디자인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죠.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어떤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는지, 적어도 이탈리아에서는,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는 젊은 학생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 디자이너이면서 인문학적인 글을 쓰고, 인지심리학의 영향도 곳곳에 반영돼 있는데.

▲ 어떤 분야에서든, 당신을 존경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쨌든 제가 디자이너와 학자로서 하는 일들을 많은 이들이 반기고 인정해 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창조 활동이 천재적인 기질에 달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항상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편인데 이런 점을 어떤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디자이너는 예술가라고 생각하고 그걸 선호하는 사람들이죠. 


- 디자인의 역사를 100년이 아니라 500년 범위로 확장해 본 점이 독특한데.

▲ 디자인의 정확한 특성은 물건이 아니라 사람에, 다시 말해 우리가 물건들을 구입하고 사랑하고 보고 사용하는 방식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대중이 탄생한 것은 르네상스 시대입니다. 처음으로 대량생산이 시작된 시대죠.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술은 오늘날 우리의 생활에 깊이 파고든 기술적인 측면 대부분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이 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오늘날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의 기원은 언제인가?”라는 것입니다.


지데일리 한주연 기자 

gdaily4u@gmail.com

Posted by have a Good story, gdaily 지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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