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는 이윤을 창출하지 않는다. 경제는 윤리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제외시키기보다, (둘 모두 필요하기 때문에) 그 두 가지를 모두 소유해야 하는 동시에, (그것들을 혼동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것들을 분리해서 소유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윤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우리가 윤리적으로 되어야 한다.”


사진_자본주의는 윤리적인가ㅣ앙드레 콩트-스퐁빌 지음ㅣ이현웅 옮김ㅣ생각의나무 펴냄 1990년 초까지 세계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양 체제가 경쟁하는 판세였다. 그러나 동유럽 사회주의 붕괴와 소련의 해체를 기점으로 이제 전 세계는 온전히 자본주의 질서 속에 편입됐다.


사적 소유와 시장 등을 근간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는 효율적으로 부를 생산했지만, 그에 못지 않은 폐단을 불러온 것도 사실이다. ‘한여름밤의 꿈’처럼 사라져간 사회주의 국가들이 만만치 않은 비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것은 그만큼 자본주의 체제의 그림자가 짙었기 때문이다.


이제 전 지구적 자본주의 상황에서 자본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현실적인 삶을 포기하는 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자본주의는 윤리적인가≫는 하나의 거대한 운명인 자본주의를 새로운 시선으로 비평하고 있다.

 

이 책의 지은이 콩트-스퐁빌은 프랑스의 최고명문 파리고등사범학교를 나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대학을 떠나 지금까지 집필과 대중강연에 집중하고 있다. 알튀세르였던 그는 스스로를 ‘알튀세르의 친구’라고 말할 만큼 스승과 아주 가깝고 친밀한 관계를 맺기도 했다.


지은이는 주로 무신론적 입장에서 현대사회를 행복하게 살아가는 실천적 방법을 제시하려 했는데, 무신론자에게도 신앙인이 갖는 영성과 비슷한 무언가가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를 질문하며 개인의 영성적 측면을 중시했다. 이 책에선 개인의 이러한 영성적 측면이 ‘가치의 차원’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지은이는 만일 ‘윤리적인’과 ‘비윤리적인’이라는 두 수식어에서 ‘자본주의’라는 말과 어울릴 말을 하나 선택해야 한다면, ‘비윤리적인’이라는 수식어가 더 적합하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본주의는-완전하게, 근본적으로, 결정적으로-윤리와 관련성이 없다”고 결론짓는다. 즉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는 윤리적이지도 비윤리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만일 굳이 수식어를 붙여 표현한다면, 비윤리적인 측면이 많기 때문에, 그 대신 개인인 우리가 윤리적으로 돼야 한다고 지은이는 이야기한다.


지은이는 분명히 자본주의 체제의 우월성과 시장의 효율성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지은이가 모든 것을 시장으로 환원시키는 입장을 가진 것은 아니다. 자신을 기꺼이 ‘좌파적 자유주의자’로 정의하는 그는 시장의 맹신에 대한 경계나 대안적 의제들을 결코 저버리지 않으면서, 좌파가 내걸었던 이상에 대해서도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고 이어갈 부분에 대해 적시한다. 다만 지은이가 좌파들에게 문제를 삼는 것은 현실에 대한 구체적 프로그램이 빈약한 채, 선전선동과 비판만을 일삼는 측면들이다. 이 점을 들어 좌파가 야당으로 있을 때엔 편해하면서, 막상 집권하면 왜 그토록 불편해하는지를 꼬집는다.


지은이는 좌파의 ‘현실에 대한 무대책’과 우파의 ‘탐욕스러움’을 동시에 비판한다. 이제는 너무도 상투적으로 들리는 이야기지만, 새는 분명 좌우의 날개로 난다. 콩트-스퐁빌은 그런 균형잡힌 시각을 제공해주고 있다.


자본주의의 윤리 문제를 화두로 끊임없이 문제제기하면서 지은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 모두를 둘러싼 자본주의적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가자는 것. 자본과 시장의 문제가 급속도로 부상해 어떻게든 그 문제를 풀어내고 조정해야 하는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지은이의 이러한 주장은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