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한국 병합을 말하다>는 일본의 진보 학자들이 지난해 일본 이와나미 서점에서 간행하는 학술 잡지 <사상(思想)>에 ‘한국 병합 100년을 묻다’라는 주제로 특집호를 마련하고 같은 해 8월에 이를 토대로 심포지엄을 개최한 결과물을 단행본으로 엮은 것이다. 한국 병합을 주제로 한 <사상> 특집호가 나오자마자 매진 사태가 벌어지고, 이 특집호를 보강해 단행본으로까지 출간하는 등 일본에서의 반응은 뜨거웠다. 아울러 같은 달 열린 심포지엄에 일반인들도 대거 참석해 이틀간 참가자가 총 1000여 명이 넘을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일본 한국 병합을 말하다, 미야지마 히로시 외, 최덕수, 열린책들

 

무려 1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건만 한국 병합을 둘러 싼 문제는 한일 양국에서 여전히 정치적, 역사적으로 논쟁적인 이슈다. 이 책의 기획자이자 지은이 가운데 하나인 미야지마 히로시는 이 문제를 놓고 일본 국내에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실상이며, 이를 해결하지 않으면 다음의 100년 동안에도 논쟁은 계속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한국 병합이 어떤 의미로 자리매김해야 되는지 오늘날의 시점에서 다시 검토해 보자고 제안한다.

 

미야자와 히로시는 특히 한국 병합을 단순히 일본과 한국의 근대사 문제로만 다룰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사 전체를 새로운 시각에서 다루기 위한 문제 설정의 장으로 생각해 보기를 권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일본 내의 한국사 연구자들이 각자의 전공 분야에서 한국 병합을 둘러 싼 제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이를 공론화함으로써 논의의 장을 마련했다.

 

최근까지도 한국 침략 문제와 위안부 문제, 독도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의 우익계 인사들이 여전히 망언을 일삼고 돌발 행동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의 자성을 끊임없이 요구해 온 진보 인사들의 연구 활동을 정리한 이 책은 일본 내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화해 왔고 현재 어느 수준에 이르고 있는지 파악해 볼 수 있게 해준다.

 

미야지마 히로시는 한국 병합이 낙후된 조선을 근대화시키기는 계기가 됐다는 일본의 침략론은 일본이 ‘동아시아의 중심’이라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해 빚어진 역사 인식이라고 지적한다. 아울러 일본이 스스로 일본사 인식의 패러다임을 전환하지 않으면 한국 병합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변화될 수 없으며 ‘동아시아 주변부로서 일본사’라는 시각에서 이제까지의 일본사 이해를 비판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해야 함을 주문한다.

 

한국 병합 당시 일본은 사실상 동아시아의 주변적 지위에 있었다는 그의 역사 인식은 일본이 유교 모델을 거부했다는 점에 근거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여러 국가가 점차 유교 모델의 수용을 추진했으나, 그 가운데 일본만이 이러한 움직임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유교 모델에 대한 무관심이 결정적으로 굳어진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였다.

 

일본의 근대화는 곧 문명화로 규정하는 데 탁월한 이데올로그였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화에 대한 최대의 장해가 유교에 있다고 간주해 유교를 철저히 배격했다. 그래서 그는 유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중국과 조선으로부터의 결별, 즉 탈아를 선언하며 일본의 문명화를 설파한 것이다.

 

그렇다면 유교를 수용하고 있던 중국과 조선이 정체 상태에 머물러 있었을까. 일본의 예상은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 통감으로서 추진한 사법 제도 개혁 과정에서부터 빗나가기 시작한다. 근대법인 일본의 민법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해 한국 독자의 민법을 제정하려 했으나 조사 결과 근대적 소유권과 매우 유사한 토지 소유권이 이미 한국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즉 몹시 지체돼 있어야 할 한국에서 근대적 소유권과 유사한 개념이 수백 년 전부터 존재했다는 것인데, 이는 유교 모델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유교 모델 자체를 봉건제의 잔재로 치부해 탈아를 통한 근대화를 추진하고자 했던 일본의 근대화 패러다임의 근본적 한계는 다른 부분에서도 드러난다. 즉 한국은 일본과 달리 중국에 인접하여 중국 문화에 선택의 자유 없이 동화됐다는 인식이 그것인데, 거기에는 가장 중요한 전제가 간과돼 있다. 다시 말해 조선에서 중국 문화가 전면적으로 수용되었다고 하는 경우 수용하는 측의 사회가 고도의 문화적 기반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으로, 가령 유교 모델의 핵심인 과거 제도가 현실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인쇄 기술의 발달과 그에 따른 서적의 보급이 필수적인 조건인데,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은 15세기 일본에서는 불가능했다는 게 미야지마 히로시의 지적이다.

 

동학 농민군 전원 살육 명령

누가, 그리고?

 

이 책에는 일본 학계뿐만 아니라 한국 학계에도 잘 알려지지 않는 심도 깊은 연구 성과물을 담고 있는데, 청일 전쟁 당시 일본 정부가 내린 동학 농민군 섬멸 작전의 전말이 대표적이다. 청일 전쟁 당시 신식 라이플 소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이 대본영의 명령에 따라 동학 농민군을 전원 살육한 작전을 추적한 이노우에 가츠오는 지금도 은폐돼 있는 이 사건을 통해 한국 병합 직전의 일본 정부와 군부의 비인도적 속성을 폭로하고 있다.

 

청일 전쟁 당시 동학 농민군의 희생자 수는 3만여 명. 부상 후 사망한 경우를 포함하면 5만 명에 육박할 것으로 추정된다. 청군과 일본군의 전쟁에서 조선의 동학 농민군의 피해가 가장 컸던 이유는 무엇일까. 1894년 10월27일, 히로시마로부터 동학 농민군 ‘모조리 살육’ 명령이 떨어진 것이 크게 작용했다. 조선 정부의 주권 하에 있는 조선 민중을 살육하는 행위인 동학 농민군 살육 명령을 대본영이 내리는 것에 조금의 정당성이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조선 정부의 대응은 어떠했을까.

 

“동학 농민군의 대다수는 협도(협박당한 자)로서 그 흉하고 완고하며 교화되기 어려운 자는 천백 중 겨우 한둘뿐, 초무할 적에 마땅히 양인과 악민을 분별해야 하고, 청하건대 일본군을 훈계하여 매사에 조선 군관과 상의할 것.” 김홍집 외부대신의 이 같은 회답은 일본의 섬멸 작전에 제동을 건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조선 정부의 이러한 요청을 무시하고 살육 작전을 감행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조선에 진출해 있던 일본군이 자체적으로 감행한 작전이 아니라 히로시마 대본영의 총리대신과 참모 총장, 참모 차장, 그리고 도쿄의 외무대신 등 이른바 정부와 군부의 최고 지도자가 조선 현지의 일본군을 선도했다는 것이 당시 타전된 전신 기록을 통해 밝혀졌다.

 

이 같은 학살에 버금가는 살육 명령이 필요했던 까닭은 평양 전투 이후 중국 영토 내부로의 침공이라는 모험적인 전략 때문이었다. 이 작전의 전모는 결국 은폐된 반면, 일본의 대륙 침공 작전은 대대적으로 부풀려졌다. 일본 정부와 군부의 지도자가 주도한 이웃 나라 정부와 민중에 대한 주권과 생명의 유린은 불문에 붙이고 만 것이다. 이것이 한국 병합 직전에 보여 준 일본 정부의 속성이었다.

 

1985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일본에서 한국 병합을 바라보는 시각을 정리한 와다 하루키. 그는 일본이 청일 전쟁 이후 조선을 침략해 왕국을 점령하고, 국왕과 정부를 굴복시킨 뒤 통감 정치 5년을 거쳐 결국 1910년 무력으로 대한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했던 점은 오늘날 널리, 그리고 분명히 알려진 사실이라고 전제하면서, 병합이 대한제국 황제와 조선 민족의 의사에 반해 힘에 의하여 강제된 것이었으며, 부당한 조약이었다는 인식을 1995년 도미치 무라야마 수상의 국회 답변, 노사카 고켄 관방 장관 발언으로부터 진전시켜 명확하게 하고, 국가적 합의로 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일본은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책을 그르쳐 전쟁으로 향하는 길을 걸어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고,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의하여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의 사람들에 대하여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고 말았습니다. 저는… 의심할 바 없이 이러한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여기에서 다시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마음으로부터 사죄하는 감정을 표명합니다.

 

사실상 일본은 1995년 무라야마 수상이 ‘손해와 고통’을 가했다는 점, ‘반성과 사죄’를 표명한다는 내용을 담은 담화를 발표한 이후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 문제에서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서 오히려 반동의 길을 걸어왔다. 무엇보다 한국 병합이 조선 민족의 의지에 반해 불법적으로 강행되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은 채 병합 조약을 체결했다는 형식으로 역사를 덧씌어 왔다.

 

와다 하루키는 1965년에 한일 양국이 역사적 식민 통치 관계를 청산하고 국교를 정상화하기 위해 체결한 한일 조약에 어떠한 결함이 있었든지 그 조약을 파기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국회 의결이든지 총리 담화로든지 일본의 새로운 역사 인식을 통해 한일 조약 제2조의 해석 대립을 해소하는 것, 즉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는 조항을 놓고 일본이 견지해 온 ‘병합 조약이 합법이나 해방을 기점으로 비로소 무효가 되었다는’ 주장을 버리고 한국 측 주장인 ‘병합이 애초부터 무효였다’고 인정하는 것이 오늘날 일본이 보여 줄 태도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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