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지데일리] “‘누구를 만나느냐’가 ‘어디에 사느냐’보다 더 중요하고 ‘꿈을 놓아버리고 사느냐’ 아니면 ‘꿈을 간직하고 사느냐’에 따라 인간은 무한히 달라질 수 있다. 그러한 사실을, 회진면의 한 포구에서 옛 친구를 만나고 술 한 잔 마신 뒤 방파제에서 노래를 부를 때 불현듯 깨달았다.”

 

느리게 걷는 사람ㅣ신정일 지음ㅣ생각의나무 펴냄 온 산천 아름다운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우리땅 걷기 예찬론을 펼치고 있는 신정일. 그는 요즘도 한 달에 3~4번은 자신이 운영하는 ‘우리땅 걷기’의 회원들과 이 나라 구석구석을 답사하러 다닌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난 바람이 부나 걷기를 20여 년. 그는 어느새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화사학자이자 도보여행의 1세대로 자리매김했다.

 

≪느리게 걷는 사람≫은 신정일이 그의 나이 열아홉 살 때까지의 일들을 담은 자전적 에세이다. 그의 삶의 화두인 길, 강,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남다른 추억들을 담고 있다.

 

이 책에서 지은이는 어린 시절 사진이 없다고 털어놓는다. 사진 한 장 남길 수 없을 만큼 가난했기에 그 흔한 돌사진조차 없다고 한다. 게다가 남들은 정규교육을 받으며 중·고등학교 졸업장을 땄지만 그는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다. 대신 그는 온 산천을 돌아다니며 스스로 배웠고 덕분에 먹어도 될 약초와 먹으면 안 되는 약초를 그 누구보다도 잘 구분한다.

 

그는 또 우리나라 산 400여 곳을 올랐고, 8대강을 몇 번이나 걸었다. 이 땅 구석구석을 누비며 옛사람들이 남긴 흔적과 자연이 내뱉는 신음소리를 지금도 충실히 전달하고 있다.

 

이 책에는 그의 어린 시절 자연과 벗 삼아 놀았던 날들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나 있다. 지금이야 별의별 장난감이 많지만 지은이가 살던 시절만 해도 자연이 놀이터였을 터. 그는 새와 뱀 무서울 게 없이 종횡무진하며 온 산천에서 뛰놀았다고 한다. 그는 “산삼 하나를 마을 사람 누군가가 발견하면 다음 날 산삼을 발견한 그 산에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땅을 팠던 일, 일 년에 한두 번씩 공터에 천막을 친 가설극장이 들어오면 검표하는 사람 몰래 영화를 보던 일들은 지금은 잘 볼 수 없어 더 그리운 기억들이다”고 회상한다.

 

지은이의 이방인같이 겉돌기만 했던 유년시절에 대한 혼돈의 기록도 이 책에 서술된다. 지은이는 아버지의 노름으로 인해 중학교에 가지 못하고 열네 살에 가출, 열다섯 살에 절에 출가를 한다. 우주 속에 내던져진 고아였던, 세상의 아웃사이더였던 한 소년이 삶을 택한 방법은 책과 함께 우리나라의 온 산천을 느리게 걷는 일뿐이었다.

 

이와 함께 지은이에게 영향을 끼쳤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일화도 소개된다. 욕쟁이였지만 호박죽을 맛있게 끓여주시던 할머니, 한평생 풍류객이었던 아버지, 가수 지망생이었던 막내삼촌 등 기억 속 아련히 남은 이웃, 그리고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일화가 흥미롭게 담겨 있다. 이 가운데 대구 시내를 정처 없이 돌다가 만난 구두 닦는 청년들과의 일화가 흥미롭다. 끝없이 방황하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대구까지 도착한 그는 우연히 구두 닦는 청년들을 만난다. 청년들은 그를 나쁜 길로 빠지게 하지 않고 한 가지 충고를 해줬다. “고생을 더하는 것이 좋을 끼다. 대구에서 고향까지 걸어가 봐라. 시간은 걸릴 끼다. 그러나 큰 체험이 될 끼다”라고.

 

왜 지은이가 그토록 끝없이 걸어야 했는지 이 책을 통해 그의 지난날을 따라가다 보면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하게 된다. 지은이는 “살아낸 것도 이긴 것이나 다름없으니 사회가 정해놓은 경쟁의 틀에 얽매이지 말고 그대 자신이 스스로 등불이 되라”고 말한다. 또 운명보다 강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운명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용기라고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