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지데일리] “70대 중반에 이르러 이처럼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자서전 비슷한 글을 쓰고 있다니, 벌써 생을 마감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내 나이 80이 넘어서야 빛을 볼 수 있을 듯하니, 앞으로 몇 년간 내 손에서 떠나지 않는 원고가 될 듯싶다.”

 

사진=옹이 많은 나무ㅣ장을병 지음ㅣ나무의숲 펴냄 지난 2009년 작고한 장을병 선생은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 생전에 자신의 지난날을 회고하는 글을 쓰면서 이같이 술회했다.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난 선생은 굴곡이 심한 초년기를 보냈다. 가정형편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자 학비를 벌기 위해 나무를 져야 했다. 1·4 후퇴 직후엔 국민방위군에 입소했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또 영동 지방의 폭설로 대학 입학원서가 제때 접수되지 않자 가짜 인장을 사용해 작성한 원서를 냈다가 시험이 늦춰지면서 원서가 이중으로 접수되는 바람에 시험 도중 쫓겨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고, 1969년 박정희 정권의 삼선개헌 국민투표를 비판하는 글을 <신동아>에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험한 민주화의 길로 들어선 선생은 1980년 신군부를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 등을 주도한 혐의로 지명수배·구금됐다가 강제해직되기까지 했던,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행동하는 지성’이었다.

 

:::시경국장이 현장에 도착하기까지 10여 분을 기다리는데, 마음이 몹시 초조했다. 화염병 하나만 터지면 모든 것이 끝장날 수밖에 없었으니 초조하고 긴장이 감도는 것은 당연했다. 마침내 김원환 시경국장이 당도해 담판을 하려는데, 보도진 등쌀에 대화를 차분히 진행할 수가 없었다. 전경들로 인의 장막을 치고 나서야 담판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내 책임 하에 여기까지 사고 없이 왔으니 종로2가까지만 길을 열어 주기 바란다. 그러면 아무 사고 없이 평화로운 운구 행렬이 이루어지게끔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다. 시경국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내게 책임을 강조하면서 “종로2가까지 길을 열어 주겠다”고 대답했다. 그 소식을 들은 학생들과 연도를 메우고 지켜보고 있던 시민들로부터 환호성과 함께 우렁찬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순간이 내 일생에서 가장 보람 있던 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에게 학문과 사회참여는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암울했던 1970년대와 1980년대 많은 지식인들이 침묵하고 있을 때 독재정권에 쓴 소리를 아끼지 않은 것은 물론 불의에 맞서 직접 행동한 인물이다.

 

1991년 대학 총장 직선제가 도입된 후 처음 치러진 선거에서 총장으로 선출돼 5년간 성균관대학교 총장을 지냈을 당시, 시위 도중 사망한 김귀정 양의 장례식 운구 행렬의 선두에 서서 학생들과 경찰 간의 일촉즉발의 충돌을 막은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현실정치에도 참여해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러나 그는 젊은이들의 향도 구실만 해주는 조건으로 정치에 관여했다가 어쩔 수 없이 정계에 발을 내딛게 됐지만, 체질에 맞지 않는 일이라 힘만 들고 성과는 없었던 같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동안 살면서 가장 멀고 힘들었던 길은 바로 민주화의 길이었다. 나라가 유지·발전해 나가는 데 민주주의가 얼마나 중요한가는 앞서도 말한 바 있다. 내가 태어나고 살아가고 있는 내 나라가 파멸하지 않고 유지 발전해 나가려면 민주화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기에 민주화하자고 외쳐 댔던 것이다.:::


 

≪옹이 많은 나무≫는 유난히 굴곡이 많았던 어린 시절부터 험한 민주화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과정, 신군부 쿠데타로 핍박받고 강제해직됐다가 복직된 일을 비롯해 공직에서 물러난 뒤 하와이에서 마지막 연구에 몰두한 일에 이르기까지 선생의 지난날이 기록돼 있다. 특히 민주화운동 과정에서의 숱한 일화들이 상세하게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중요 사건들을 정치학자의 시각에서 분석해 놓아 단순히 한 개인의 기록에 그치지 않고 한 시대의 이야기를 글로 남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