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독ㅣ제임스 하딩 지음ㅣ이순희 옮김ㅣ부키 펴냄 <알파독- 그들은 어떻게 전 세계 선거판을 장악했는가?>는 소여 밀러 그룹을 통해 정치 문화가 어떻게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추적한 한 편의 논픽션 드라마다. 이 책에 따르면, 소여 밀러 그룹은 1970년대부터 미디어를 활용한 이미지 정치로 전 세계의 선거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이들의 전략은 정치인을 상품으로, 유권자를 소비자로 전락시키는 폐해를 낳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모든 것은 ‘부시의 책사’ 칼 로브에게서 시작됐다


지은이 제임스 하딩은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취재하던 중 칼 로브를 만났다. 부시를 두 번이나 대통령으로 만든 일등공신 로브는 당시 부시-체니 선거본부를 지휘하고 있었다.


이런 로브에게 어떤 기자가 “당신의 가방에는 무엇이 들었나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로브는 껄껄 웃으면서 핵폭탄의 암호가 들어있다고 농담으로 받아넘기지만, 그 질문은 하딩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당시 전 세계를 지배하던 이미지 정치, 미디어 선거를 비롯한 정치판을 둘러싼 모든 문제가 그 가방만 열리면 풀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하딩은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정치 컨설팅 업체 ‘소여 밀러 그룹’의 행적을 좇기 시작한다. 칼 로브가 펼치는 책략이 바로 소여 밀러 그룹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소여 밀러 그룹은 영화 제작자 데이비드 소여와 카피라이터 스콧 밀러가 함께 만든 정치 컨설팅 업체. 이들은 텔레비전의 위력을 간파하고 1970년대부터 네거티브 공세, 포커스 그룹 활용, 인물과 이미지 위주의 캠페인 등 이른바 미국식 미디어 정치를 펼쳤다. 전 세계의 선거전에서 승리하면서 정치문화 변화의 주역이 된다.


지은이는 이들을 망보는 개의 무리를 이끄는 대장 개에 빗대어 ‘알파독’이라고 지칭하며, 철두철미한 인터뷰와 꼼꼼한 자료 조사를 통해 소여 밀러가 누볐던 전 세계 주요 정치 현장을 생생하게 되살려내면서 자신의 질문에 답하기 시작한다.


책에 따르면, 데이비드 소여는 본래 배우 지망생이었으나 침착하지 못한 성격 때문에 카메라 뒤로 인생의 방향을 전환한 인물이다. 기록영화를 만들던 소여는 1960년대 후반 정치인들의 의뢰를 받아 전기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들어 준 영화 덕분에 유대인 사업가가 펜실베이니아 주지사로 당선되면서 소여는 자연스럽게 선거판에 몸을 담게 된다. 1968년 푸에르토리코 정치인의 홍보 영상을 제작하며 남미와 인연을 맺은 소여는 몇 년 뒤 베네수엘라에서 첫 대통령 선거를 경험한다. 


::: 여러 해가 지난 후 소여는 얼룩무늬 고양이를 호랑이라고 선전했던 그때 일을 회상하곤 했다. 그만큼 필사적으로 페르난데스 선거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을 방안을 찾아다녔지만 정치 컨설팅으로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소여는 이 일을 통해서 후보의 실제 인물상을 완전히 무시하고 전혀 다른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좋지 않은 방법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터득했다. :::


이와는 반대로 경쟁자인 페레스는 열정적이고 힘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페레스 역시 미국 컨설턴트인 밥 스퀴어를 고용했는데, 그는 스퀴어의 충고대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와 자신의 의혹을 직접 해명했다. 페레스는 자신이 씩씩하고 박력 있고 문제를 처리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였다. 선거에서는 졌지만, 소여는 베네수엘라에서 미래의 정치를 목격했다. 그것은 바로 정당보다 인물이 더 중시되고, 텔레비전이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


이 책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대목은 1997년 우리나라의 대통령 선거를 들 수 있다.


소여 밀러 그룹이 처음 김대중을 만난 것은 1986년 필리핀의 피플파워 혁명 직후였다. 코라손 아키노처럼 김대중 역시 군부독재 정권에 저항해 온 민주화 투사였다. 소여 밀러는 필리핀의 승리가 텔레비전으로 인해 얻은 것임을 강조했다.


::: “현대에 텔레비전의 위력은 엄청납니다. 텔레비전은 미국인들이 마음을 터놓는 친구입니다. 미국인들은 텔레비전을 통해서 역사가 펼쳐지는 것을 지켜보지요. 1986년 필리핀 선거는 미국의 텔레비전이 제안하고 미국의 텔레비전 덕분에 승리를 거둔 선거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미지입니다. 마르코스는 머뭇거렸고 아키노는 확고하고 자신만만했습니다. 미국인들이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있을 때 텔레비전에서는 필리핀의 수녀들이 탱크 앞에 서 있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 텔레비전은 의견을 형상으로 표현했어요. 그것이 미국인들을 움직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위력과 현상을 재현해야 합니다.” :::


하지만 김대중의 당선은 쉽지 않았다. 좀처럼 열리지 않던 돌파구는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정계 은퇴 선언에서 나왔다. 1992년 대선에서 또 다시 패배한 김대중은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그는 평범한 시민이 되겠다고 했다. 하지만 소여 밀러는 그의 이미지를 바꿀 수 있는 기회로 보았다.


::: “패배를 인정한 것은 당당하고 용감하고 격조 높은 행동이었습니다. 전략적으로도 온당한 일입니다. 이 일로 인해서 닫혀 버린 문도 있지만 앞으로 훨씬 많은 문이 열리게 될 겁니다.” :::


소여 밀러는 김대중을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민주 투사이자 정치가로 부각시켰다. 1995년이 되자 그의 정계 복귀를 대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어 1997년 10년에 걸친 소여 밀러의 노력은 마침내 김대중 대통령 당선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필리핀 선거전 이후 가장 먼저 시작되고 가장 뒤늦게 성공한 일이었다.


이 책은 소여 밀러 그룹이라는 거물급 조직의 행적을 좇아 세계 선거전의 이면을 낱낱이 파헤치고 앞으로의 변화를 예단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