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롱뇽과의 전쟁≫은 인간처럼 언어와 도구를 사용하지만 어떠한 권리도 주장하지 않는 순박한 도롱뇽들과 그들의 노동력과 기술력을 착취하는 탐욕스러운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에피소드에 관한 이야기다.


사진_도롱뇽과의 전쟁ㅣ카렐 차페크 지음ㅣ김선형 옮김ㅣ열린책들 펴냄.jpg 지은이 카렐 차페크는 연구 보고서를 비롯해 여행기, 취재기, 각국의 신문 기사와 영화 시나리오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자료를 적용해 20세기 인류의 상흔을 실감나게 묘사해 냈다.


책은 인간처럼 말하고 두 발로 걷는 도롱뇽과 그들에 의한 인류의 멸망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인간과 도롱뇽과의 전쟁은 부분적으로 다뤄진다. 차페크의 관심은 전쟁을 묘사하는 데 있지 않다. 인간과 같이 문명을 이룩한 도롱뇽의 등장과 그들이 문명을 이룩해 내는 과정을 통해 지은이는 인간(인류)의 본질을 꿰뚫고자 한 것이다.


지은이는 20세기 초 인간들의 노력이 빚어낸 우스꽝스러운 세계상을 촌철살인의 풍자로 펼쳐 놓는다. 과학과 상업, 국가주의, 학문, 저널리즘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수많은 목소리들은 하나같이 ‘인류는 왜 멸망할 수밖에 없는가?’라는 질문에 답한다. 도롱뇽들은 인간들의 기술을 좇아 ‘유토피아’를 이룩하지만, 이는 사실 인류 멸망의 기록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파우스트 곁에 서 있는 제자 파우스트처럼 인간들 곁에 서 있다. 그들의 학식은 인간 파우스트들과 같은 책을 토대로 얻어진 것이지만, 그들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며 그 어떤 회의도 그들의 마음을 잠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간들과 다르다. 가장 무서운 사실은 이 교육받다 만, 무뇌아 같으며 독선적인 유형의 어중간하게 문명화된 존재들이 광대한 규모로 증식해, 수백만 수십억의 동일한 표본들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다. 아니, 잠깐. 내가 틀렸다. 진정 무서운 사실은 그들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이다.



책은 J. 반 토흐, G. H. 본디, 포본드라로 대표되는 인간들이 도롱뇽들과 얽히며 자의든, 타의든 인류의 멸망을 야기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지은이가 이야기하는 종말은 다층적인 개인들의 잘못된 선택들이 벽돌처럼 쌓이고 또 쌓여 완성된다. 그 시작은 네덜란드 상선의 선장  J. 반 토흐로, 그는 수마트라 섬 근처의 작은 섬 타나마사에서 진주조개잡이를 하던 중 우연히 두 발로 걷는 도롱뇽을 발견한다. 그리고 도롱뇽에게 도구를 쓰는 법을 가르쳐 진주를 캐게 하고 그 대가로 인간이 만들어 낸 다양한 물품을 제공한다.


반 토흐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적 탐욕, 이상주의가 기묘하게 얽혀 탄생한 인물이다. 바타크족과 신할라족 진주조개잡이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그이지만, 도롱뇽은 애완동물처럼 아끼고 보살핀다. 반 토흐의 어린 시절 친구이자, ‘태평양 무역 회사’라는 거대 기업의 소유자인 G. H. 본디는 도롱뇽의 노동력을 사업화해 막대한 부를 얻는 인물이다. 그는 선박을 구입하여 진주가 있는 곳으로 도롱뇽들을 이동시켜 도롱뇽들의 기하급수적 번식을 초래한다.

 

이 책에서 진정한 주인공은 G. H. 본디의 문지기인 포본드라다. 그는 자신의 원대한 이상을 실현시켜 줄 사람을 찾다가 본디를 방문한 반 토흐 선장을 집 안으로 들여보내 줌으로써 도롱뇽들이 문명을 이룩하는 데 공을 세운다. 그가 도롱뇽에 관한 온갖 자료를 모로지 스크랩한 덕분에 도롱뇽들의 역사가 보존되고 재구성된다.


옛날에 바다가 만물을 뒤덮은 적이 있었지. 이제 또 그렇게 될 게다. 이게 세상의 끝이야. 한 신사분이 지금 프라하가 있던 자리가 옛날에도 바다였다고 했다. 그때도 도롱뇽 때문이었을 거야. 그거 아니? 그 선장을 저택에 들이는 게 아니었어. 어쩐지, 마음 한구석에 이러면 안 된다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선장이 팁을 주지 않을까 해서 그랬어… 근데 팁은 끝까지 못 받았다. 아무 이유도 없이 내가 전 세계를 망쳐 버린 거야.



그러나 포본드라는 인류가 도롱뇽에 의해 멸망 위기에 처하자, ‘모두 내 잘못’이라며 괴로워한다. 지은이는 포본드라를 통해 인간의 어리석음을 풍자하는 듯하지만, 이는 그가 인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잘못된 선택이 인류의 멸망을 불러온다면, 희망 역시 구체적이고 생생한 사람의 분별 있는 선택에 달려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 세계를 날카롭게 풍자하면서도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만은 끝까지 따뜻한 지은이의 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