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1964년 뉴욕 스테이블 갤러리에서 앤디 워홀이 <브릴로 상자>라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세계 예술계는 커다란 반정을 맞이하게 된다. 이후 아서 단토는 <브릴로 상자> 출현 이후 ‘예술의 종말’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냈고, 1997년 <예술의 종말 이후>라는 책을 통해 근대 예술사 이후의 예술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생각해낸 바 있다.



*예술과 생태, 박이문, 미다스북스


그러나 <예술과 생태>의 지은이 박이문은 아서 단토 역시 헤겔적 역사관에 따라 ‘역사는 우주가 자기반성적으로 자기인식의 성숙성에 도달하는 과정의 이야기로, ‘역사에는 반드시 종말이 있다’는 말처럼 예술사 역시 우주의 축소판으로서 역사의 패턴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된단 말인가? 이성의 가르침에 따라 곧게 살고 양심의 명령에 따라 옳게 사는 것 말고 다른 의미가 어디 있겠는가? 궁극적 어둠을 다소나마 밝혀주는 이성과 양심의 빛 말고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그러기에 끊임없는 희망과 좌절, 의미와 무의미의 애매한 중간 지역에서 헛될지 모르지만 애를 쓰고, 착각일지 모르지만 주장하고, 질지 모르지만 투쟁하고, 배반당할지 모르지만 사랑한다. 어둠과 빛의 중간 지역에서 우리는 모르지만 알려 하고, 쓰러지지만 다시 일어나고, 결국은 죽지만 살려고 한다.


단토의 예술적 정의는 일종의 어떤 대상을 표상, 즉 의미하는 언어이며, 그 언어는 반드시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고, 예술이라는 언어의 의미는 육화된 것이라고 요약된다. 그러나 지은이는 단토의 예술적 정의가 기존 어느 정의보다도 통찰력 있지만 완전히 참신한 것은 아니라고 반박한다. 


그 이유로 모든 자연어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단토가 말하는 ‘육화된 의미’를 전달하며, 그가 말한 예술의 세 가지 조건에 의존해서는 어떤 것을 예술작품으로 보고 또 보지 않을 것인지 명확한 방법이 나오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이에 지은이는 “예술의 개념, 예술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단토의 정의를 포함한 지금까지의 모든 예술관을 만들어낸 시각과는 전혀 다른 관접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은이에 따르면 예술이나 예술작품의 제작, 감상, 의미부여, 보존이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넘어 모든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은 예술이 인류의 보편적이고 원초적 필요성을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나아가 예술작품은 언어라는 매체를 삭제하고 인간의 의식 대상을 표현하고자 하는 시도다. 또 예술작품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어떤 대상을 가장 충실히 표상 혹은 표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언어적 프로젝트다.


문학예술을 제외한 모든 예술양식의 언어가 대부분 감각과 감성에만 의존할 수 있는 그림, 무용, 연극 등이 비정상적이고 구체적인 운동이거나 색 같은 것인 이유는 예술적 표상의 근본적 프로젝트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성격을 가장 잘 띠고 있는 예술적 언어의 모델로서 지은이는 그의 예술철학과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새들의 ‘둥지’ 개념을 제시한다.


둥지를 지배하는 건축학적 원리와 철학은 인간의 모든 건축물만이 아니라 사회적, 윤리적, 경제적, 일상적인 모든 활동의 원리 원칙과 모델로 채용돼야 한다. 나아가 인간의 바람직한 모든 활동은 예술이라는 언어의 렌즈로 보고 움직이고 만들고 판단하고, 예술이라는 인간의 구조물의 의미와 가치를 새들이 트는 ‘둥지’의 건축 원리라는 렌즈에 비춰 제작하고 관찰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둥지는 생태학적으로 친환경적이고 미학적으로 아름답고 건축공학적으로 견고하며 감성적으로 따듯하고 영적으로 행복하다. 그렇다면 우주를 구성하는 서로 다른 모든 개별적 존재들, 특수한 구조, 그것들 간의 무한 수에 가까운 관계, 그리고 그것들의 의미와 궁극적 가치들은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볼 때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동일한 형상의 다양한 측면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역동적인 새들의 둥지 리모델링 작업은 무한하고 유일한 삼라만상의 은유 즉 메타포라고 주장하며 둥지의 예술철학을 창조적으로 증명해내고 있다.
 

지은이는 또 한국의 근현대 문학론에 대한 개념적 체계적인 정의와 비판을 시도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시, 소설, 예술 일반이 ‘참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라는 물음으로 그것이 예술 본질적으로 옳은 것인지 필요한 것인지를 검증한다. 이에 대해 그는 “시인으로서의 시민이냐, 시민으로서의 시인이냐?”라는 물음에 “진정한 참여문학, 진정한 의미에서의 평화를 위한 글쓰기는 철저하게 문학적인, 철저하게 시적인 작품을 쓰는 데 있다”고 논증한다. 


다만 시민으로서 의무의 이행 문제에 있어서는 이와 달리 개인들의 ‘실존적 결단’에 달려 있다고 답한다. 때문에 시민이자 시인으로서 문학인들은 그때그때의 결단에 따라 어느 때는 시민으로서, 또 어느 때는 시인으로서 참여를 선택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지은이는 나아가 문학의 본질, 그것의 총화로서의 ‘시’의 본질에 대해 역설한다. 시는 존재에 충실하고자 하는 정신의 언어적 표현인 동시에 언어에 의한 언어의 파괴 작업이기 때문에 시인은 상식적으로 상투적인 모든 것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는 “시는 모든 예술의 근원적인 바탕이며, 모든 예술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면서 자기미학으로서 창조적인 시론을 마무리하고 있다.


전통적인 인간 중심주의는 인간의 오만이 만들어낸 착각이다. 인류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가장자리에 있으며, 인류의 기적 같은 진화는 유대·기독교·이슬람이 전제하고 있는 바와 같이 초월자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었거나 힌두^불교가 주장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자연의 우연한 산물이다. (…) 자연은 한없이 아름답고 자비롭다. 미국 원주민이 대지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자연은 모든 생성의 원천이자 젖줄이다. 그것은 대자연이 보면 볼수록, 느끼면 느낄수록,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선하고 풍요하기 때문이다. 자연은 무한히 조용하면서도 생기에 넘치고, 무한히 소박하면서도 아름답고 거룩한 모든 것들의 모체이자 그것들 자체이다. 자연은 영혼을 가진 인류를 비롯한 유인원, 그 밖의 수많은 종류의 식물과 동물들 및 신비롭고 거룩한 모든 생명체의 고향이자 거처이며, 일터이자 휴식처이고, 행복의 둥지이다.


지은이는 철학자로서 진정한 ‘자유’를 꿈꾸기 때문에 ‘패거리문화’도 만들지 않고, ‘조직’에 가입하지도 않고, 현실적인 ‘당파’를 유지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그의 개인적인 성향 때문이 아니라 자신마의 문학적, 예술적 관심 영역이 인간일반 전체를 향하고 있고, 그의 철학적 관심이 우주적 영역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철학적, 예술미학적, 문학적 주제들에 대한 심층적이면서도 진지한 탐구는 이를 반증하고 있다.


지은이는 책을 통해 세계의 모든 이들이 기존의 인간 중심주의적 서구 합리주의적 이성에서 탈피해 ‘생태학적 이성’에 눈뜨기를 주장하고 있다. 환경파괴와 생태계의 근본적 위기 앞에서 인간이 생태적 미래를 지속가능하도록 유지할 수 있는 근본적이고도 유일한 방법임을 역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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