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_지상의 모든 음식은 어디에서 오는가ㅣ게리 폴 나브한 지음ㅣ강경이 옮김ㅣ아카이브 펴냄.jpg 19세기 말 기근과 불평등이 만연한 시대 모스크바에서 소작농의 손자로 태어난 니콜라이 바빌로프는 기아에 시달리는 러시아 인민들, 나아가 인류의 고통을 덜고자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종자를 모으고 연구한 과학자였다. 하지만 얼치기 학자이자 정권의 나팔수 리센코와의 논쟁을 거치며 스탈린의 정치적 희생양이 되고 만다. 결국, 굶주리는 인민들을 두고 유람이나 다닌 부르주아 반동, 소련 농업을 고의로 망친 간첩 등의 오명을 쓰고 감옥에서 영양실조로 죽는 비극적 운명을 맞는다.


작물 다양성의 기원을 찾아 중앙아시아의 파미르 고원에서 에티오피아와 아메리카를 거쳐 아마존 열대우림까지 세계 오대륙을 탐사한 러시아의 식량학자 바빌로프의 이야기는 자연과 인간이 남긴 위대한 유산, 씨앗을 찾아가는 여행기이자 위대한 식량학자의 일대기다. 여기에 바빌로프의 발자취를 따라간 지은이 게리 폴 나브한의 여정이 겹쳐지면서, 세계화와 농산물 산업화, 기후 변화, 유전자조작농산물 등이 어떻게 생물 다양성을 해치고 우리의 밥상을 위협하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은 땅과 인간과 정치가 어떻게 서로 연결됐는지, 작물 다양성과 전통 농업지식이 인류의 풍요로운 미래를 위해 얼마나 소중한 유산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교통도, 치안도 변변치 않았던 20세기 초에 세계를 돌아다닌 바빌로프의 여정은 위험하고 힘들 수밖에 없었다. 주로 노새를 타고 다녔던 그는 말라리아에 걸려 고생을 하기도 하고, 계곡을 건너다 목숨을 잃을 뻔도 하고, 첩자로 오인을 받아 여러 차례 감금을 당하기도 하고, 폭도들에게 붙잡혔다 도망치기도 하는 등 온갖 곡절을 겪으며 씨앗을 찾아다닌다.


탐사 기간 동안 농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던 바빌로프는 세계의 논과 밭에 인류의 미래를 위한 작물과 지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특히 작물 다양성의 기원지에 관심이 많았다. 갖은 고난과 위험을 무릅쓰고 계곡과 산악지대를 찾아다닌 것도 그곳이 생물학적・문화적 다양성을 만들어내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곳에서 수천 년간 인간과 자연이 상호작용하며 만든 다양한 작물과 그 원형을 찾아 미래의 작물 선발과 재배에 활용하면 인류의 풍요로운 미래에 도움이 되리라고 확신하며 세계로 향한다.


바빌로프는 세계를 누비면서 파미르 고원에서 가뭄에 강한 ‘진드함 잘 닥’이라는 품종을 찾아내기도 하고, 이탈리아의 포 계곡에서 작물에 사용하는 수많은 속명(俗名)을 보고는 수천 년 동안 농부들이 지역 적응 품종을 찾아내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깨닫기도 한다. 또 에티오피아의 독특한 생물 문화유산, 사과나무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카자흐스탄의 숲, 미국인들도 몰랐던 토착 재래종 ‘악마의 발톱’ 등을 찾아내 세상에 알리기도 한다.


바빌로프는 작물 다양성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지역의 종자를 교환하며 기후 변화에 대비하는 농부들, 오랫동안 숲을 가꾸며 식량을 얻어온 아마존의 원주민들, 수분이라곤 전혀 없는 모래언덕에서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호피족과 나바호족, 변화무쌍한 기후와 환경에 탄력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단일한 작물을 심지 않고 여러 작물을 심는 농부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들의 근원적 생명력과 지혜를 들려준다. 한편 집단농장의 실패로 인한 소련의 대기근, 환금작물 재배로 식량안보를 잃고 만신창이가 된 레바논의 비극 등은 인간과 땅과 정치가 어떻게 연결됐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바빌로프의 발자취를 좇은 지은이의 여행기가 겹쳐지는 이 책의 형식은 작물 다양성 지대에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기후 변화로 인해 파미르 고원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바빌로프가 감탄해 마지않았던 풍요로운 작물의 요람이었던 이탈리아의 포 강이 왜 고통의 강이 되었는지, 천국과도 같았다고 바빌로프가 극찬한 사과나무의 기원지는 급속한 도시화에 떠밀려 어떻게 훼손되고 있는지, 유전자 작물의 유입으로 옥수수부족들이 얼마나 고통에 처해 있는지, 다국적기업의 물 남용과 기후 변화로 사막의 호피족이 어떻게 변했는지, 산림 벌채와 소작으로 고통받는 아마존의 잉가족까지, 자유무역과 기후 변화, 유전자조작농산물이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생물 다양성을 위협하고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지은이는 그러나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땅을 일구고 지키는 사람들을 놓치지 않는다. 기아를 겪은 뒤 국제단체가 제공하는 하이브리드 종자를 거부하고 가뭄에 강한 전통종자를 심은 에티오피아의 농부들, 거대 종자회사가 씨앗을 지배하려는 상황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종자를 교환하며 저항한 파미르 고원의 농부들, 전쟁 중에도 활기를 띤 레바논의 ‘수크 엘 타예브’ 등을 통해 작지만 소중한 희망을 읽는다.


세대를 뛰어넘어, 이상과 열정으로 무장하고 세계를 누빈 두 과학자의 이야기는 수많은 다양성을 잃어가면서도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우리에게, 식량문제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진중하게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