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병합 100주년에 즈음해 일본 간 나오토 총리의 담화가 있었다. 다음 100년을 내다보며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구축하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국내 여론들은 담화 내용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한일 강제병합 조약의 불법성을 인정하는 발언도 없었고, 군 위안부나 징용 노무자 등 전쟁 피해자들의 보상 문제에 대한 언급도 찾을 수 없었다. 한마디로 알맹이는 모두 빠졌다는 것이다.

 <일제 강제동원, 그 알려지지 않은 역사>는 한일 과거사 문제의 최대 쟁점 중의 하나인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를 본격적으로 조명한다. 일본 본토는 물론 사할린, 남양군도까지 일본 전범기업이 조선인 노무자들을 강제 동원했던 작업장을 중심으로 취재한 르포다. 일제가 조선인 강제동원을 시행하게 된 전후 배경부터 강제동원이 본격화된 1939년 이후의 상황을 피해자의 증언과 관련 연구 기록을 토대로 새롭게 복원했다.

 

이 책의 지은이(김호경 권기석 우성규)는 현직 기자들이다. 2009년 말 미쓰비시에 강제 동원됐던 근로 정신대 할머니들에게 후생연금 탈퇴 수당금 명목으로 99엔 지불을 판결한 일명 ‘99엔 사건’에 충격을 받아 이 문제에 뛰어들게 됐다고 한다.

 

이들은 현장 취재를 중심으로 하되, 이와 병행해 자료조사에도 많은 공력을 들였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이하 강제동원조사위)와 같은 정부 기관과 국내외 연구 기관들의 방대한 자료를 치밀하게 검토하는 한편,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일본 내 사회운동가들이 제공한 각종 문서와 사진자료 등을 취합하고 기존 연구자료와 상세하게 대조해나갔다. 역사적 진실을 다루는 문제인 만큼 작은 통계 수치 하나라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해 올해 초부터 9월까지 <잊혀진 만행, 일본 전범기업을 고발한다>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연재됐다. 이 책은 그 기획기사를 골격으로 해 연재 당시 지면의 한계로 빠진 부분과 취재 때 미진했던 부분들을 대폭 보완해 엮어낸 것이다.

 

책은 우선 일제 강제동원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부족한 이들을 위해 조선인 강제동원의 방식과 유형, 과정을 실제 강제동원 피해자의 사례를 짚어가며 설명한다. 또 강제동원의 한 축으로 작동한 일본 기업들의 숨겨진 역할에 대한 중요한 물음을 던진다.

 

책은 이어 일본 본토의 강제동원지를 취재한 글을 각 기업별로 묶었다. 우리 사회에도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미쓰비시나 미쓰이 같은 일본의 대기업은 물론 국내에 비교적 자 일본 기업들의 조선인 노무자 작업장을 취재했다. 필자들이 찾아간 대부분의 작업장은 폐광됐거나 관광지로 탈바꿈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역사의 흔적을 찾으려는 필자들의 힘겨운 취재 과정이 흥미롭게 그려진다.

 

책은 또 일본 본토를 제외한 강제동원지인 남양군도, 사할린 등에 대한 현장 취재와 국내 동원, 유골 반환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특히 국내 동원의 경우 일제가 조선인들을 석탄을 캐는 일보다 금을 캐는 일에 집중적으로 동원시킨 사례가 눈에 띈다.

 

이와 함께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일본 정부와 기업 간의 피해 배상, 미불임금 보상에 대한 소송 투쟁의 역사를 보여준다. 반복되는 패소에도 불구하고 소송을 멈추지 않는 피해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그들을 돕는 한일 양국 시민운동가들의 뜨거운 열정이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책은 특히 일제시대 강제동원 분야 중 징병과 군 위안부 부분 보다 징용 부분에 집중하고 있다. 징병과 군 위안부 피해 사실에 대해선 국민들의 인지도가 상당히 높은 반면, 피해자 규모 면에선 훨씬 압도적인 징용 문제에 대해 오히려 일반적 관심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을 반영한 것이다.

 

실제 학계의 연구 결과를 검토한 바에 따르면, 1939년부터 해방 전까지 6년 동안 매년 조선 인구의 30%나 되는 600~700만 명이 일제의 강제동원 현장에 투입됐다. 그리고 이렇게 동원된 노무자 중 적게는 10~20만 명, 많게는 50만 명이 작업장에서 죽음을 맞았다. 필자들이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를 ‘전 민족적 수난’이었다고 기술하는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책은 또한 기존 국내 연구들이 간과해온 강제동원의 주요 축인 일본 기업들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939년경 일본 대기업들은 일제의 침략전쟁에 조달할 물자를 생산하기 위해 군수기업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당시 대기업들은 생산 인력에 필요한 인원을 모집하기 위해 식민지에 눈을 돌렸다. 대기업들이 고용한 브로커들이 조선 현지로 찾아가 모집 활동에 주도적 역할을 했고, 노무자 인솔부터 작업장 관리까지 기업의 손이 미치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필자들은 조선인 강제동원지로 알려진 나가사키 조선소, 미쓰이 탄광과 같은 당시 강제동원 작업장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일본 기업들이 강제동원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실증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증언과 자료를 찾는 데 주력했다.

 

책에는 강제동원 피해자 보상 문제의 해법을 찾기 위한 필자들의 다각적인 노력과 고민의 과정이 담겨 있다. 전문가 집단의 자문, 외국 사례의 검토, 중국인 동원 피해자들이 일본기업 배상 청구 소송으로부터 화해를 이끌어낸 사례를 점검한다. 이를 통해 강제동원 피해자 보상 문제는 결코 해결 불가능한 문제가 아님을 역설한다. 특히 필자들은 독일의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EVZ)의 사례를 주목하면서, 전범기업들이 전후 일본 정부에 맡긴 미불임금에 대한 공탁금 등을 토대로 일본 정부와 함께 기금을 창설할 것을 제안한다.

 

또한 중국인 강제연행 피해자들이 니시마츠건설과 화해를 이끌어내어 보상금을 받아낸 데에는 중국 정부의 노력과 중국 국민의 여론이 크게 작용했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한국 정부와 국민들이 일본 전범기업의 국내 투자·영업 활동에 제약을 줄 수 있는 압박 수단들을 강구할 수 있다면, 전범기업들이 지금처럼 강제동원 문제를 미온적으로 대응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동안 강제동원 피해자 보상 문제와 관련한 해법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많이 논의돼왔다. 이 가운데 몇몇 제안들은 충분히 실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 문제의 해결에 난항을 겪고 있는 것은 왜일까? 지은이는 그 주된 이유가 우리 정부의 의지 부족에 있다고 본다.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협정으로 대일청구권 문제는 끝났다는 입장이고, 과거 정부와 기업들이 행한 범죄 사실을 먼저 나서서 밝힐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필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일본 정부에 도의적 책임을 묻기 전에 우리 정부가 강제동원 문제를 보다 치밀하게 조사하고 피해자들의 보상 해법을 강구했어야 한다는 의견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현황 조사는 물론이고 미불임금 규모, 일본 내 미귀환 유골 파악 등 강제동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수적인 사전조사조차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배상 문제에 있어서는 일본 정부와 기업들을 제대로 압박하지도 못했다. 2004년 특별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보상 문제도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렇다면 그동안 정부는 이 문제에 왜 이렇게 소극적으로 대처했을까? 지은이는 강제동원의 문제가 한편으로 소수자 문제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주장한다. 피해자들 대부분이 고령에다가 자기 목소리를 내기 힘든 사회적 약자였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실제 통계를 보면, 강제동원 피해자의 대다수가 오늘날까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다. 보통 마을에서 가장 못 배우고 힘이 없는 사람들이 징용 대상자로 뽑혀 끌려갔다. 그들은 한창 경제적 활동을 할 나이에 돈 한 푼 없이 귀향해야 했고, 그중에는 부상자도 적지 않았다. 이렇게 그들은 고국에 돌아와서도 수십 년간 사회적·경제적으로 낮은 지위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국가는 소수자인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다. 그러다 2003년 청와대 앞에서 사건이 터졌다. 자신들의 호소에 무관심한 국가를 향해 일제 피해자 단체 회원들이 강력한 시위를 벌인 것이다. 일명 ‘국적 포기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 정부는 2004년부터 위로금 지원 사업을 시작한다. 일본 정부와 기업이 돌려주어야 할 돈을 한국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대신 주겠다는 것이다.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유족, 부상자의 유족, 생환자 등을 구별해 보상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지은이는 우리 정부가 이만큼이나마 강제동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환영할 일이나, 여전히 여러 가지 면에서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우선 강제동원 노무자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기록이 빈약하다는 주장이다. 이런 기록은 주로 일본에 기댈 수밖에 없는데, 일본 정부와 기업으로부터는 기초적인 자료들밖에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가 보다 전략적으로 일본 정부의 협조를 얻어내야 한다는 게 지은이의 생각이다. 이 밖에 국내 동원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지원되지 않는 점, 미불임금 지급금이 현대 물가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점도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책은 역사적 과오에 대한 분명한 청산 없이 한일관계의 미래를 얘기할 수 없다는 전제 아래 과거 일본의 비인간적인 만행과 이에 대한 우리의 선결과제를 다시금 떠올리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