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과 작고한지 1년이 됐다. 서거 당시 우리 사회는 충격 그 자체였다. 검찰 조사를 받는 동안 쏟아지던 보수 언론과 여론의 무차별적 비난과 임기 중반 이후부터 줄곧 바닥을 맴돌았던 지지율이 무색할 정도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국은 추모 열기로 들끓었다. 어떤 이들은 이를 두고 사람이 죽은 것에 대한 동정심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권력만을 좇던 다른 대통령들과 노무현이 근본적으로 다른 지도자임을, 한국 사회에 누구보다 큰 의미를 던져 준 대통령임을 알고 있었다.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을 넘어ㅣ김기협 지음ㅣ서해문집 펴냄역사학자 김기협은 보수주의자임을 자처한다. 세상에 별 욕심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풍족한 생활이나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도 없다. 그저 편안하게 사는 세상을 바랄 뿐이다. 그런 그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한 건 결국 이명박(MB)정권이었다.

 

:::하나의 죽음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낸 것은 역사상 드문 일이다. 그중 한 사람으로서 나는 내가 흘린 눈물의 의미를 아직도 그 밑바닥까지 알지 못한다. 얼굴 한 번 마주친 적 없는 그 개인을 위한 눈물이라기보다 이 사회를 위한 눈물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할 뿐이다. 내 눈물의 의미도 모르면서 어찌 다른 사람들의 눈물에 담긴 의미를 재단하겠는가.

슬퍼하는 자는 슬퍼하게 하라.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다.:::

 

2009년 5월 김기협은 이른바 ‘노빠’가 됐다고 한다. 그는 당시 우리사회를 몰아친 수구와 시대착오의 광풍 속에서 원칙과 상식이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보며 분노했고 그전까지와는 다른 삶의 자세를 갖게 됐다고 술회한다.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을 넘어>는 이러한 분노로 써내려간 글이다. 그동안 줄곧 사회와 거리를 두고 있던 지은이가 본격적으로 사회 안으로 들어와 발언을 하기 시작한 2009~2010년 사이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에 연재한 칼럼을 엮은 책이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10년 사이’ 생긴 변화의 의미를 짚어보기도 하고, 자신의 생각을 그때와 비교해 보기도 한다. 이 책엔 19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정권의 교체’, IMF사태, 남북관계 발전, 중국의 부상 등 역사적인 큰 변화들이 소용돌이친다.

 

지은이는 또 진시황의 통치체제를 빗댄 프랑스의 역사소설을 소개하며 MB정권의 법률만능주의를 비판하고, <사기>에 나오는 형가, 고점리, 전광의 이야기를 소개하며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의 의미를 되새긴다. 백악기 말기 공룡에 한나라당을 비유하는가 하면, 19세기 말부터 조선 교구장을 지낸 뮈텔 주교와 비교하며 김수환 추기경의 공로를 인정하기도 한다.

 

더불어 뉴라이트의 저열한 역사의식에 대해서는 서슴지 않고 비판의 칼날을 휘두르지만, 식민지 시절 일본에 협조한 상층부의 역할을 모두 친일로 규정하는 것은 비현실적 순결주의일 뿐이라 주장하며, 모든 친일 행위를 죄악으로 몰아세우는 것에도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다.

 

특히 지은이는 MB를 폐쇄적 소수집단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인물이라고 지적한다.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시위와 용산 참사를 지나 노무현 전 대통령 검찰 수사를 통해 극에 달한 MB정권의 퇴행은 결국 노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주장한다.

 

2009년 있었던 용산 참사를 둘러싼 정권의 반응을 통해 지은이는 ‘세력’의 실체를 낱낱이 밝혀낸다. 용산참사 사건이 벌어진 이후 ‘과격’과 ‘불법’만을 내세우는 그들을 “공직자의 책임은 차치하고 인간으로서도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존재들”이라고 규정한다. 또 수사기록을 제출하라는 법원의 명령을 거부하는 검찰을 향해 “국민을 위해 일하는 공무원으로서의 기본적 직업윤리도 망각했다”고 비판한다.

 

미디어법과 관련해선 입법 과정에 불법성이 있지만 법률의 효력에 문제가 없다”는 판결을 내린 헌법재판소를 향해서는 ‘이완용’에 비유한다. “이완용은 팔아먹을 것으로 나라가 있었기 때문에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고 그들이 팔아먹을 것으로는 헌법이 있었기 때문에 헌법을 팔아먹은 것뿐이지, 맡겨놓은 것을 뭐든지 팔아먹으려는 배짱은 똑같은 것이다.”

 

지은이는 노무현이 힘든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와 같은 특권 구조의 인프라를 청산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특권 구조의 청산은 원칙과 상식이 살아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은 노무현 자신이 돈과 조직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정치공학이 아닌 정치철학으로 대통령의 자리까지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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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는 특권 구조의 주변부에 있는 이들과 함께 언론과 진보 진영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주저하지 않는다. 특히 “‘박연차 게이트’ 빨대질에 안달이 난” <경향신문>에 실망하며, ‘찌라시’가 아닌 ‘좋은 신문’을 만들어 줄 것을 주문한다.

 

진보 진영에 대한 지은이의 생각은 ‘현실감각’을 키우라는 것이다. 일례로 노 전 대통령 취임 초기 진보 진영이 ‘굴욕적 대미관계 청산’을 바란 것에 대해 이는 일거에 청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미국과의 관계가 현존하는 상황에서 부시정부와 긴장을 유지하는 동시에 한중관계를 발전시키고 남북 사이에 신뢰의 근거를 다진 것이 커다란 성과라고 반박한다.

 

:::진보주의자들의 아름다운 꿈이 장차 이 나라를 얼마나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을지 나는 큰 관심이 없다. 그런 꿈을 들고 나와 국민의 선택 앞에 내놓을 수 있으려면 이 나라를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곳으로 먼저 만들어 놓아야 한다는 것이 지금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다. 상식과 원칙이 통하게 하는 것, 그것은 보수주의자의 할 일이다. 그래서 나는 보수주의자를 자처한다.:::

 

김기협은 자신을 보수주의자이며 큰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2009년 ‘함께 사는 세상’의 의미를 깨달았다는 그는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 될 때까지 부지런히 싸울 것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