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인들이 자기 문화의 물질적 우월성, 특히 과학적 사고와 기술 혁신에서 나타난 우월성을 인식하게 되면서 다른 지역의 문화와 사람들에 대한 영향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또 유럽인들 자신이 판단한 만큼 긍정적이고 타당한 결과를 가져왔을까.  

 

사진_기계, 인간의 척도가 되다ㅣ마이클 에이더스 지음ㅣ김동광 옮김ㅣ산처럼 펴냄.jpg 산업혁명을 전후로 유럽인이 획득한 물질적 업적은 비서양에 대한 ‘지배 이데올로기’를 견고히 했다. 종이, 나침반, 무기, 철도, 선박과 항행 도구에서부터 천문학, 수학, 의학과 같은 과학지식, 철학, 노동에 대한 태도, 시간개념, 공간지각에 이르기까지 유럽인은 광범위한 분야에서 과학과 기술의 척도를 통해 비서양 사회를 평가하고 등급을 매겼다.

 

<기계, 인간의 척도가 되다>는 500년에 걸친 유럽인과 비서양인 사이의 교류를 추적함으로써 아프리카인과 아시아인의 성취가 어떻게 경멸됐고, 비서양인의 가치체계와 조직 형태가 어떻게 비판받았는지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책은 우선 해외 팽창 초기 수세기 동안 비서양인에 대한 유럽인의 우월함과 그 차이의 원천이 과학·기술이 아닌 ‘기독교 신앙 ’에서 비롯됐음을 살펴본다. 또 18세기 전후 이뤄진 유럽인의 획기적인 과학적 발견이 비서양에 대한 지배권을 어떻게 형성하기 시작했는지를 중국과 인도에 대한 관점 변화, 그리고 아프리카 노예무역을 둘러싼 찬반 논쟁을 통해 살펴본다.

 

책은 이어 19세기 말 2차 산업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거울상을 이룬 쌍둥이’가 된 과학과 기술의 결합을 다룬다. 이들 결합이 이뤄낸 산업 확산, 증기기관차의 빠른 속도와 안락함, 발명의 증가는 유럽인이 사실상 아프리카와 아시아 민족을 직접 정복하고 통치할 수 있도록 했다. 중국의 군사적 후진성을 여실히 드러낸 아편 전쟁, 아프리카의 짐바브웨 기원에 대한 의구심 등의 사례를 통해 물리적 업적이 어떻게 비서양 사회를 평가하고 등급을 매기는 척도로 간주됐는지도 살펴본다.

 

책은 문명화 사명과 결부된 제국주의 팽창이 아프리카인과 아시아인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유럽인의 굳건한 믿음을 분석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19세기의 철도, 증기선, 서양 기계는 아시아의 ‘쇠퇴한’ 문명을 소생시키고 아프리카의 ‘미개한’ 민족을 향상시키는 핵심 요소로 인식됐다. 특히 철도는 ‘당대의 가장 위대한 경이’로 간주돼 유럽의 힘과 물질적 정복을 극적으로 보여줬다. 더불어 자연의 정복, 시간과 공간지각에 대한 인식, 노동에 대한 태도 등의 사례를 통해 유럽인과 비서양 민족 사이에 벌어진 간격을 살펴본다.

 

책은 또 비서양인의 기술적 능력 획득과 과학지식 숙달 수준에 대한 유럽의 사회사상가와 식민지 정책입안자들 사이의 의견 대립을 다룬다. 19세기 초반 이후 유럽인은 인종 집단 사이에 정신적·도덕적 능력의 선천적 차이가 있다는 믿음의 과학적 타당성을 입증하려 했으며, 이는 두개골 형태와 유형 같은 육체적 차이를 정량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이러한 인종주의 관점이 비서양 민족을 판단하는 다른 기준들을 놓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이와 함께 20세기의 인간 가치를 가늠하는 과학과 기술 척도의 타당성을 향한 문제 제기, 문명화 사명에 대한 유럽인의 의구심을 다룬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산업화된 세력으로 등장한 일본의 사례는 ‘열등한 인종’이 선천적으로 유럽의 창조성과 물질적 능력을 따라올 수 없다는 통념을 무너뜨렸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에서 벌어진 기계화된 살육과 참호전의 대재앙은 문명화 사명의 허구를 드러냈고, 과학과 기술의 지위는 땅에 떨어졌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상대주의와 문화적 다원주의가 관심을 받았으며, 서유럽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힌두교와 불교가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책은 마지막으로 유럽의 세계 패권이 쇠퇴하고 그 바통을 이어받은 미국의 근대화이론을 살펴본다. 과학과 기술의 역할을 강조한 근대화 패러다임은 서양 지배의 최고 이념이었던 문명화 사명을 밀어냈지만, 1970년대에 이르러 기본적인 방법론의 결함을 비롯한 거의 모든 측면에서 비판에 직면했다. 여기서 서양과는 다른 역사적 경험과 문화를 가진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적합한 대안적 개발 전략이 필요함을 언급하며 ‘적정 기술’에 대한 탐색 가능성을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