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송(KBS) 간판 프로그램인 인간극장의 <그해 겨울, 어머니와 나는>과 산문집 <똥꽃>을 통해 잘 알려진 농부 전희식. 그는 치매 걸린 어머니를 모시며 생명을 살리는 농사짓기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 그가 모시는 것은 어머니뿐 아니라 공생 공존하는 온갖 미물들과 마을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다.

 

사진_땅 살림 시골 살이ㅣ땅 살림 시골 살이ㅣ전희식 지음ㅣ삶이보이는창 펴냄.jpg <땅 살림 시골 살이>는 전희식의 이러한 생명 모심의 철학과 범부로서 농사지으며 있었던 다양한 시골 살이에 대한 이야기다. 알콩달콩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에 윤기를 더한 삽화는 그의 딸인 전새날이 직접 그려 넣었다.

 

전북 장수군 덕유산 중턱, 고즈넉한 오두막집에 살고 있는 농부인 지은이. 그리고 치매에 걸린 여든아홉의 어머니. 그림을 그리는 딸 새날이와 아버지처럼 농사를 짓겠다고 농업고등학교에 들어간 아들 새들이. 그곳에서 복닥복닥하며 살고 있는 시골마을 사람들. 또 이들과 함께 생명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개와 닭, 우렁이와 지렁이, 곡식들과 풀들….

 

이 책의 주인공은 바로 이들 모두다. 지은이에게 이 땅위에서 ‘살림’ ‘살이’를 하는 모든 것들이 모심의 대상이다.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에게 가장 특별한 사람은 어머니. 혼자 힘으로 7남매를 키우고 농사일에 누에치는 일, 길쌈까지 하며 억척스럽게 살았지만 누구보다 현명한 어머니. 그런데 여든이 넘어 다시 ‘아기’가 된 어머니와 함께 그는 시골로 들어갔다. 어머니를 가장 잘 모실 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매다 간 곳이 지금 살고 있는 마을이다.

 

지은이는 매일 아침 어머니에게 세숫물도 갖다 드리고, 머리도 곱게 빗겨드리며 온갖 수발을 다하는 아들이지만 어머니 눈에는 농사일이며, 살림이며 서툰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늙고 병들었어도 여전히 자식 걱정뿐인 어머니,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마음, 그 마음을 전희식은 모시고 산다.

 

나는 어린애 달래듯이 하며 지렁이가 몸을 편다 싶을 때 줄자를 대놓고 셔터를 눌렀다. 길이는 30센티미터가 조금 넘었다. 사진을 찍고는 제일 축축해 보이는 밭 구석에 지렁이를 모시고 가서 흙으로 잘 덮어주었다. 지렁이 한 마리가 1년에 평균 10킬로그램의 거름을 만들어낸다는데, 너는 덩칫값을 꼭 하라고 격려를 해주었다. 사람 중에는 먹기만 하고 빈둥빈둥 노는 사람도 있지만 지렁이는 먹는 것 자체가 일이니까 덩치만 크고 빈둥거리는 지렁이란 있을 수 없다고 봐도 될 것이다. 다만 남의 밭으로 넘어가지만 말라고 당부했다. 남의 밭에 가면 맹독성 농약 때문에 명대로 살지 못할 테니, 이 밭에서 좋은 짝 만나 자식 많이 낳고 자자손손 천수를 누리라고 축복을 해주었다.


 

지은이가 모시는 또 다른 것은 땅과 땅위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이다. 호미나 괭이질을 할 때도 함부로 땅을 내리찍지 않고 살살 긁어낸다. 농사일에서 가장 큰 일꾼이라고 생각하는 지렁이가 다칠까봐서다. 또 총총한 별들이 보이는 ‘생명살이 뒷간’을 한 달여에 걸쳐 힘들게 짓기도 했다. 집을 지을 때처럼 모든 자재는 다 재활용이었다. 전희식이 땅위의 생명을 소중히 모시는 이유는 ‘주어진 자연을 피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고스란히 내면화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지은이가 이 책에 담아낸 것 중 가장 많은 사연은 시골마을 사람들과 알콩달콩 엉켜 살아가는 이야기다. 그는 오랫동안 노동운동 현장에서 치열하게 활동하다가 귀농을 했지만, 이제 누구보다도 농부다운 농부가 됐다. 이웃 할아버지, 할머니와 주고받는 농이 진하게 무르익어 정겹기만 하다. 귀농 10여 년이 훌쩍 넘다 보니 도시와 달리 시골에서 살기 위해선 ‘이웃과 어우러져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서다.

 

새벽에 일어났는데 금이가 낑낑대는 소리가 났다. 순간적으로 ‘맞다, 새끼 낳는구나’ 싶어서 마당 구석에 있는 개집에 가 봤더니 정말 금이가 새끼를 낳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목줄이 말뚝에 칭칭 감겨 있고 개집 속에 깔아준 몇 장의 수건은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밤새 진통이 오죽 심했으면 저랬을까 싶었다. 부랴부랴 말뚝에 감긴 목줄을 풀고 마른 수건을 가져다 다시 깔았다. 자리를 만들어주자마자 새끼 한 마리를 툭 낳아버렸다. 새벽 6시가 조금 못 된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지은이가 그려내는 농촌의 풍경은 마냥 포근하거나 핑크빛 모습은 아니다. 투박한 농촌 사람들의 에피소드는 우리가 잃어버렸던 정겹고 따뜻한 풍경 그대로지만, 자본주의의 침투와 이에 적응해가는 실상까지 있는 그대로 담아냈다. 하지만 농촌은 아직 우리가 가야 할 ‘오래된 미래’에 가깝다.

 

지은이는 책에서 주름진 삶의 모습, 그러나 가난한 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넉넉한 모습을 정직하게 담아낸다. 농촌 사람들이 살아가는 쉼표와 같은 일상을 들여다보면 잔잔한 웃음과 한 움큼 풀냄새와 고향의 흙냄새를 맡는 느낌을 전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