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 정수하. 그는 1982년 독일 베를린으로 디자인 유학길에 오르면서 세계여행을 시작,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을 비롯 폴란드·체코·헝가리 등의 동유럽을 거쳐 베트남·일본·싱가포르·발리 등에 이르기까지 28년의 여정을 이 책 <길 걷는 디자이너>에 담고 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 등 뒤에 실려 떠났던 지게여행, 바다풍경을 그리던 크레파스소녀를 통해 ‘색깔’을 알게 된 지은이가 10여 년이 지난 뒤 미대생이 돼 스케치 여행을 떠나 크레파스소녀가 장님이 됐다는 사실을 우연히 접한다. 허무한 생각에 무작정 동지나행 원양어선에 몸을 실은 그는 1년6개월간 외롭고 고된 바닷길 여행을 자처한다. “어쩌면 나는 눈 먼 여자를 대신한 눈빛으로 바다를 여행했을 것이다.”


▲ 길 걷는 디자이너, 정수하, 멘토프레스.


여행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지은이의 인생과 예술에 있어 훌륭한 스승으로 자리 잡는다. 아비뇽에서 만난 소녀(한국계 혼혈)에게 지게를 직접 만들어 달빛 아래를 거닐기도 하고, 폴란드 단스크에서 만난 장님신부에게 떨리는 마음으로 초상화를 바치기도 한다. 

이태리 토스카나 처녀의 품에서 젖먹이 어린아이처럼 잠들기도 하고, 짝사랑에 빠졌던 부다페스트의 집시소녀와 아쉬운 이별을 하고, 일본의 게이샤 사요코와 낭만적인 강가산책이 이어진다. 지은이의 머리를 하염없이 깎아주려 했던 리아와의 만남 등에 이르기까지 저마다의 사연과 향기를 지닌 여인들이 책속에 등장한다.

학교 건너편의 ‘카페 뷔네’를 오가는 여행방랑자들과 인생의 참뜻을 아는 노인들은 삶의 나침반처럼 그에게 인생의 교훈을 주며 걸어가야 할 길을 제시해준다. 카페 ‘필름뷔네’에 모여든 여행자들은 지은이를 부추긴다. “여자와 사랑이 인생이란다, 술도 인생이지.” “그런데 예술은 왜 빼요?” “여비가 없으면 길 걷는 디자이너 하면 되잖니. 길에서 디자인 일해서 그 여비로 계속 길을 떠나는 거야.” 그들의 가르침에 따라 좌충우돌식 여행이 시작된다.

또한 무전실에서 고래고기만 먹는 늙은 무선사, 제자에게 여자 사귀는 법을 알려주는가 하면 진정한 디자인 세계에 눈뜨게 해주던 노교수가 매력있게 다가온다. 학교 뒤뜰 잔디밭에서 전위예술가 존 케이지, 백남준의 강연이 이어지고 특히 “길은 이 세상에서 가장 기다란 화면이자 놀이터”라 했던 백남준의 말은 여행에 안달난 작가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이밖에도 유럽의 샤먼 요셉 보이스, 수위 아저씨와 자코메티에 얽힌 비화, 같은 대학 작곡과 교수로 있던 윤이상으로부터(어느 한국학생의 죽음을 애도하는) 비석제작을 의뢰받은 지은이가 끝내 늙은 거장의 속삭임에 눈물 흘리고 마는 사연을 지은이는 책에 담아낸다.

중년을 넘긴 그의 글은 아시아로 옮겨진다. 유럽에서의 길이 젊음과 자유의 축복이었고 예술은 축복의 향연이었다면 아시아의 길은 역사와 문화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며 예술은 그 성찰에 대한 실질적 행동으로 전개된다. 지은이는 ‘조국과 결혼한, 호치민(胡志明)’의 뇌세포를 땅굴줄기로 묘사하는데, 리콴유의 현대적 국가도시 싱가포르와 비교하며 호치민의 땅굴을 ‘20세기 베트남민족의 최고 건축물’로 평가하고 있다. 

발리에 정착한 지은이는 대나무 디자인에 몰입, 애벌레 같은 소품, 활짝 벌린 조개무리를 닮은 조명등, 기찻길 문양을 심은 가구, 공옥진의 병신춤 같은 허리굽은 등, 씻김굿의 소리가 담긴 고목나무 등을 제작해 세계 최초로 ‘대나무 디자인’ 작품을 선보인다. 이 작품들에서는 그의 철저한 자연주의 정신이 돋보인다.

지은이는 특히 ‘자유와 꿈’만 있다면 인간은 누구나 여행자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길과 여인은 축복이고 예술은 축복의 향연이라는 그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관찰과 애정을 책을 통해 잘 드러내면서, 결국 ‘인간과 자연 이상의 아름다운 디자인이 없다’는 단순진리를 끌어낸다.

여행의 끝길에서, 노교수가 던진 다음의 말은 우리 모두가 음미해봄 직하다. “디자인이 인생이고 인생은 디자인이다. 디자인이 없는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디자인이 필요 없는 인생이 진정한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