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빛도 공기도 거의 들어오지 않고 팔다리를 움직일 공간도 없는 참혹한 독방에서 7년을 살았다고 하면 믿을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다.”

 

15세기 유럽과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 대륙 간엔 대규모 노예교역이 있었다. 이후 4세기에 걸쳐 1500만 명의 흑인들이 짐승처럼 취급되며 대서양을 건너 운반됐다고 전해진다. 이 끔찍한 교역을 주도했던 유럽의 노예상인들은 흑인들을 노예로 만들며 ‘그들을 구제한다’고 믿었다.

 

이미지_ 린다 브렌트 이야기, 헤리엇 제이콥스, 이재희, 뿌리와이파리.jpg ◇린다 브렌트 이야기, 해리엇 제이콥스/이재희, 뿌리와이파리

 

인간다운 대접이라곤 전혀 받지 못하는 강제수용소과 같은 노예선을 타고 식민지 농장에 도착한 흑인들은 삼엄한 감시와 체벌 속에서 지옥과 같은 노예생활을 견뎌야 했다.

 

<린다 브렌트 이야기>는 흑인 노예 시대, 특히 여성들이 겪는 성적 착취와 학대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책이다. 지은이 해리엇 제이콥스는 린다 브렌트라는 가명으로 1861년 이 책을 출간했다. 세 살 난 노예주의 ‘재산’으로 양도된 노예 소녀가  끊임없는 성적 괴롭힘에 맞서서 6년 11개월의 유폐 생활까지 견딘 끝에 자유주로 탈출하는 파란만장한 이야기와 노예가 썼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유려한 문체로 출간 당시 충격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책에 따르면, 당시 많은 노예 여성들은 주인의 협박과 회유에 굴복해 순결을 빼앗겼는데, 그러다 주인의 아이를 낳게 되면 노예상에게 팔려 멀리 쫓겨나거나 안주인의 채찍에 맞아 죽곤 했다. 린다 역시 열다섯이 되면서 어린 주인의 아버지 플린트 의사에게 성적 괴롭힘을 당했고, 그의 협박으로 누구에게도 말 한 마디 못한 채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밀폐된 공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했고, 한 줄기 빛도 없는 온전한 암흑 속이었다.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어떤 구멍도, 틈새도 없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나를 계속 짓눌렀다. 단 한 줄기 빛도 없는 곳에서 언제까지나 몸을 똑바로 펴지도 못한 채 눕거나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하지만 노예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이느니 이런 상황을 견디는 게 나았다.


 

하지만 린다는 늘 당하기만 하는 소극적인 약자는 아니었다. 자신에게 진심으로 대해주는 백인 남성 샌즈 씨에게 마음을 빼앗긴 린다는 혐오스러운 폭군에게 순결을 유린당하느니 자신이 사랑하는 미혼 백인 남성의 아이를 갖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바바라 웰터가 지적한 것처럼 19세기는 '순결이 젊은 여성에게 종교만큼 중요하던 시기'였으므로 린다는 죄책감에 시달렸지만,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것으로 주인에게 복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린다 브렌트 이야기 그렇게 린다는 두 명의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플린트 씨는 포기하기는커녕 린다에게 더 강하게 집착했다. 아이들 역시 노예제 속에서 고통받을 거라는 사실이 린다를 더 힘들게 했다. 린다는 자신이 사라지고 나면 주인이 아이들을 팔아버릴 것이고, 그럼 할머니나 샌즈 씨가 아이들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할머니 댁 헛간 다락방으로 숨어들었다. 비바람과 태풍을 나무판자 지붕 하나로 견디면서도 린다는 좌절하지 않았다. 벽에 작은 구멍을 뚫어 상황을 조망하고, 가족들과 은밀히 소통하며 적의 동태를 파악했고, 주인을 혼란에 빠뜨릴 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6년 11개월 동안 좁디좁은 독방에서 분투한 끝에, 주인에게서 아이들을 빼앗고 자유주로 도주하는 데 성공했다.

 

은둔처에서의 두 번째 겨울은 첫 번째보다 더 혹독했다. 운동을 못하고 똑같은 자세로 있다 보니 수족은 점점 감각을 잃어갔고 추위 때문에 계속 경련이 났다. 머리 쪽에서 느껴지는 냉기가 특히 심했다. 얼굴과 혀가 점점 굳는 것 같더니 급기야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의사를 부르는 것은 물론 불가능했다. 동생 윌리엄이 찾아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필립 삼촌은 나를 계속 지켜보았으며 불쌍한 할머니는 회복의 기미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쉴 새 없이 처마 밑으로 오르내렸다. 얼굴에 찬물을 끼얹자 나는 정신이 돌아왔다. 깨어보니 동생의 품에 안겨 있었다. 동생은 몸을 숙여 나를 바라보며 눈물을 철철 흘리고 있었다. 나중에 동생은 내가 열여섯 시간이나 의식이 없어 죽은 줄 알았다고 말했다.


 

지은이는 탈출에 성공한 후 노예제의 속박 아래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아니 그보다 더 극심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2백만 남부 여인들의 처지를 북부 여성들이 깨닫게 됐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이 책을 출간했다. 그는 1863년 노예제가 폐지된 후에도 해방노예의 자립을 돕고 여성권리신장을 위해 애쓰다가 1897년 고귀한 생을 마쳤다.

 

미국 흑인 노예 여성이 쓴 최초의 자서전인 이 책은 <미국 노예, 프레더릭 더글라스의 인생 이야기>와 함께 ‘노예 서사’라는 장르의 출발점이 됐으며, 1960~70년대에는 인권운동과 여성해방운동에 큰 영감을 끼쳤다는 데서 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