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과 나무가 좋다. 고매한 사대부의 붓끝에서 학문을 과시하거나 아첨의 소재로 회자하던 사군자나 억지 충절의 소나무가 아닌, 쇠풀로서, 나물로서, 손때 묻은 도끼자루나 봉당의 처마 끝자락에까지 구부정한 가지들이 드리운 돌담 옆의 배나무처럼 민초의 삶에 깃들어 있는 자연의 일부로서의 그것들이 마냥 좋다.”

 

이미지_ 나무가 민중이다, 고주환, 글항아리.jpg *나무가 민중이다, 고주환, 글항아리.

 

나무는 산소를 만들어 우리 인간이 호흡하는데 지장이 없게 해준다. 많은 이들이 의식하지 못할 뿐,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절대적인 존재가 바로 나무다. 이렇게 인간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나무의 존재감을 도시에 사는 많은 이들이 하루에 얼마나 느끼고 있을지 궁금하다.

 

<나무가 민중이다>는 도시화되지 않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삶이 얼마나 자연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었는지, 또 그것이 현 시점에서 얼마나 새롭고 진귀하게 여겨지는 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농사꾼이자 목수였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나무에 대한 살아있는 지식과 어머니나 주변 어른들, 때로는 지은이 고주환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풀과 나무의 갖가지 생활상식과 민담을 소개한다.

 

경기도에서 산업체를 경영하는 지은이는 부모님께 물려받은 성황림마을의 자그마한 오두막집을 주말마다 오가면서 텃밭을 일구고, 현지의 식생과 민속, 마을의 민속지를 부지런히 관찰하고 기록한 글과 사진을 이 책에 담고 있다.

 

그동안 민초의 생활과 가까웠던 풀과 나무를 주 대상으로 삼았던 지은이는 불쏘시개부터 시작해 쓰이지 않는 곳이 없었던 소나무, 국수까지 말아먹었던 느릅나무, 장기알을 만들었던 대추나무와 같은 ‘민족의 나무’ 외에도, 길가의 풀들을 대표하는 질경이, 민들레, 쑥, 들국화, 곤드레와 같은 풀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처럼 살아있는 식물도 다루지만 ‘죽은 식물’도 이야기한다.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인 ‘지게’와 머리에 돌을 이고 찧던 어머니의 ‘디딜방아’가 바로 그것이다.

 

지은이의 아버지가 젊었을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당시 성황림 근처에도 산마다 피난민들이 그득했는데, 이들이 추운 밤을 견디기 위해 집집마다 문짝을 다 떼어다가 불을 땠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자 집마다 문부터 만들어 달아야 했다. 지은이의 아버지는 이 문짝을 만들어서 팔아 한 밑천을 잡은 뒤 본격적인 목수의 길에 들어섰다고 한다. 목수 아버지의 이야기는 이 책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음색이 처량하고 맑은 퉁소는 대개 대나무로 만들어졌지만, 대나무가 없던 영서 산간지방에선 구릿대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 음색이 처량하고 맑은 퉁소는 대개 대나무로 만들어졌지만, 대나무가 없던 영서 산간 지방에선 구릿대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자료도움=글항아리>

 

이야기엔 ‘구릿대퉁소’가 등장하는데, 대나무퉁소를 기막히게 잘 불던 그 아버지는 우연한 일로 이 퉁소가 깨어져버리자 매우 아쉬워했다. 대나무는 추운 영서지역에서는 귀한 나무라 아버지는 대나무와 비슷한 구릿대를 잘라다가 저음의 구릿대퉁소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대추나무는 단단하기로 유명하다. 한번은 지은이의 아버지가 유년의 그에게 마른 대추나무로 팽이를 만들어줬는데, 얼마나 야물고 옹골지던지 쇠심을 박은 친구들의 팽이보다 훨씬 오래 돌았다고 한다. 그래서 지은이는 하나를 더 만들 요량으로 마른 대추나무 가지를 잘랐다가 아버지에게 불호령을 들었다는 추억담을 꺼내놓는다. 그런데 그 이유는 나무를 상하게 했다는 게 아니었다. 마른 대추나무는 너무 단단해 오히려 연장을 상하게 하니 절대로 연장을 대지 말라는 이야기였다고 한다.

 

나무는 장난감

풀은 먹을거리

1900년 지개에 잔뜩 옹기를 쌓아 시장으로 팔러 나가는 옹기장수의 모습

 

산골마을에서 아이들은 자연에서 뛰어놀았다. 나무로 놀이기구를 만들어 놀기도 하고 나무나 풀을 먹거리로 삼아 산천을 뛰어다녔다. 지은이는 줄기 속이 텅 비고, 대나무처럼 마디마다 막혀 있는 구릿대나무로 물총을 만들어 놀았다고 한다. 손목 굵기만 한 구릿대의 밑동을 낫으로 잘라 마디의 막힌 부분을 한쪽만 남긴 뒤 못으로 작은 구멍을 뚫어 총통을 완성하는 식이었다. 꽃이 지고 난 으름덩굴은 단단한 열매를 맺어, 그 녹색껍질이 어찌나 단단한지 줄기째 따서 빙빙 돌리다가 대장놀이할 때 부하들의 머리통 꿀밤을 먹였고, 느릅나무의 껍질은 도랑가에 똬리 친 뱀을 보곤 부리나케 느릅나무 껍질을 벗겨 막대 끝에 올가미를 만들고 그것을 홀켜 들고 다녔다. 지은이는 이 이야기들을 통해 그 아득한 시절로 돌아가고픈 소회를 털어놓기도 한다.

 

◆ 1900년 지게에 잔뜩 옹기를 쌓아 시장으로 팔러 나가는 옹기장수의 모습. <자료도움=글항아리>

 

지은이는 이외에도 한 마을이 봄부터 겨울을 살아내는 풍경, 화전을 붙여먹던 강원도 지역민들의 나무에 얽힌 삶, 트럭이 탈탈거리며 넘어오던 읍내 나가는 길 위의 그 아름다운 풀꽃들과 나무들에 대한 오막조막한 사진과 이야기들을 소탈하게 풀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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