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서점(buchhandlung)이라는 단어는 ‘책을 다루는 곳’을 뜻한다고 전해진다. 책방은 전통적으로 단순히 상품으로서의 책을 파는 곳이 아니라, 만들어내고 널리 전하는 곳이었다. 즉 책이 타고난 생명에 또 다른 개성을 부여하고, 수많은 사람과의 인연을 이어주고, 넓은 세상으로 내보내는 일이 이뤄지는 지성의 산실이었다.

*유럽의 명문 서점, 라이너 모리츠, 박병화, 프로네시스


출판계에서 오랜 경험을 쌓아온 라이너 모리츠는 <유럽의 명문 서점>에서 “정말 멋진 서점들은 무자비하 도시계획에 밀려나가거나 파산하여, 우리 기억 속에만 인상 깊게 남아 있을 뿐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아쉬워한다. 그러면서도 21세기 복합문화공간으로서 서점의 미래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답을 모색한다.

삶은 우리가 원하는 노래를 들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순간이 꼭 없으라는 법이 있을까.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그리는 서점에 대한 희망사항을 옛 노래처럼 읊조리곤 하지 않는가. 오직 서점만이 그러하다. 서점은 좋았던 날들을 그리워하도록 만드는 곳임에 분명하다.

이 책은 지은이가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수준 높은 안목으로 독특한 매력을 지닌 서점 스무 곳을 선택, 그곳의 다양한 면모를 소개하고 있다.

이 책에 소개된 서점들은 짧게는 수십 년에서 많게는 수백 년까지 대체로 역사가 오래된 곳들이다. 고서점 특유의 낡은 박물관과 같은 분위기를 지닌 곳이 있는가 하면, 멀티미디어와 첨단 시스템으로 손님이 원하는 책을 찾아주는 현대적인 시설도 있다.

고서점에선 시대별로 명사들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어, 이들의 일화와 주고받은 편지, 친필 사인과 같은 희귀본뿐만 아니라, 인터넷 시대에 뒤지지 않으려는 혁신적인 노력도 아끼지 않는다. 그렇다고 인기를 끄는 베스트셀러를 무차별적으로 진열하기보다는, 인기가 없더라도 언젠가 빛을 볼 수 있는 책, 진열 자체로 서점의 자부심을 드러낼 수 있는 책에 무게를 둔다.  

엘리아스 카네티는 소설 <현혹>에서 주인공 페터 킨이 어릴 때 서점을 꾸리고 싶은 열망을 품었던 것으로 묘사한다. 서재에서 불행한 결말을 맞는 주인공은 어떤 서점에서 밤을 새다가 유령이 다가오는 느낌을 받는다. “밤만 되면 온갖 유령이 날아와서 책 위에 쭈그려 앉았다. 유령들은 거기서 책을 읽었다. 눈이 커다란 유령들은 불빛이 없어도 상관없었다. … 수만 권이나 되는 책 하나하나마다 유령이 쭈그리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서점 안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여기저기서 유령이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페터 킨의 귀에 들렸다. 읽는 속도도 페터 킨만큼이나 빨랐다.” 이 책의 아름다운 서점들에서도 간혹 유령을 마주칠지 모른다. 하지만 책 읽는 유령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종이책은 앞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서점에는 미래가 있을까”. 책에 소개된 서점들은 이러한 물음에 “그렇다”면서 생존은 물론 분명한 미래가 있다고 호언하는 것 같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는 여럿이다. 고객 전용 서가는 기본이고, 책을 담아주는 비닐 봉투를 친환경적인 천 가방으로 대체해 유행을 몰고 온 서점이 있는가 하면, 와인이나 선물용품과 같은 전시 품목을 다양화해 인터넷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을 동원하기도 한다. 서점들끼리 제휴를 맺어 독특한 경영 방식으로 난항을 타개해나가는 곳도 있고, 세계화를 맞아 자국어 도서와 외국어 도서의 경계를 허문 곳도 있다. 그런가 하면, 뛰어난 도시 선정만으로 ‘올해의 서점’으로 뽑힌 곳도 있다.

특히 이 책에 소개된 서점들은 대체로 건축미가 뛰어나다. 미술사에 나오는 유명한 천장화를 감상할 수 있는 서점도 눈을 사로잡는다. 또 고색창연한 대성당이나 예배당은 물론 전차 고가 철로 아래 아치를 새롭게 단장해 명소가 된 서점도 있다. 모두 건축적인 외관에 걸맞게 다채로운 진열대와 독특하고 편안한 실내장식, 풍성한 서가를 뽐내기도 한다.

많은 것이 변하긴 했지만 서점을 드나드는 일은 여전히 잊지 못할 체험이 된다. 일단 서점에 발을 들여놓으면 사람들은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 시간 가는 것도 잊고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며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즐거움을 맛보다가, 들어올 때는 살 생각이 전혀 없었던 책을 한 아름 안고 집으로 돌아간다.

책은 이제는 희미해져가는 책방의 전통과 로망을 지켜가고 있는 사람들, 오랜 동안 책을 다뤄온 그 능숙하고 애정 어린 손길로 책의 미래를 열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풍성한 사진과 함께 정성스레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