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 마리의 동물들이 단지 병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살처분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집단적인 떼 죽임을 자행하는 동시에 원인을 제공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다. 단지 ‘관행’이라는 이유만으로 동물의 삶을 짓밟을 수 있다면, 인간은 참으로 잔혹한 동물이다.

 

이미지_ 동물 권리 선언, 마크 베코프, 윤성호, 미래의창.jpg ◇동물 권리 선언, 마크 베코프/윤성호, 미래의창

 

인간에게 보내는 동물들의 절절한 메시지를 담은 <동물 권리 선은>에서 지은이 마크 베코프는 동물들의 소리 없는 외침이 이제 그 정점에 이르렀다고 경고하면서, 시급히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면 인간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과 함께 공멸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는 공장식 가축농장에서부터 과학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되는 갖가지 동물 실험,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동물을 우리에 가둬놓은 동물원, 심지어는 집에서 기르는 애완동물에 이르기까지, 지은이는 동물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근본적으로 잘못 됐음을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동물의 희생 없이는 우리의 행복이 불가능할까. 과학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힘없는 동물들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실험을 강행해야 할까. 생활하는 데 불편하다는 이유로 반려동물을 거세하고 성대를 수술하는 것이 과연 그들을 사랑해서일까. 개체 수가 늘어난다고 해서 무차별적인 사살이 용납될 수 있을까.

 

지은이는 이에 대해 단지 선택의 문제라고 일축한다. 우리는 동물들의 삶을 바꿀 수 있으며, 그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행위 역시 지금 당장 멈출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불완전함에, 우리보다 훨씬 하등한 모습을 가진 그들의 비극적 운명 앞에서 우월감을 느낀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실수를 저지르는 대목이다. 그야말로 엄청난 실수다. 왜냐하면 동물은 인간의 기준에 의해 평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더 오래되고 더 완벽한 세상에서 이미 우리가 잃어버렸거나 결코 가져보지도 못한 확장된 감각을 타고난 그들은 우리에게는 절대 들리지 않는 자연의 소리에 따라 살아가고 완벽하게 움직인다. 그들은 우리의 형제도, 우리보다 열등한 존재도 아니다. 그들은 삶과 시간의 그물 속에 우리와 함께 사로잡혀 있는 다른 세계 혹은 화려하고 고통스런 지구 속에 우리와 함께 갇혀 있는 수감자들일 뿐이다.


 

마크 베코프.jpg

 

가슴으로 떠올려 보자. 차에 치여 길바닥에 누워 날개를 파닥거리는 가여운 작은 새, 피크닉 테이블을 기어가고 있는 이름 모를 벌레, 인간이 모는 자동차들을 뒤에 거느리고 고속도로를 당당히 걸어가는 코요테, 한 신사의 어깨에 앉아 결코 떨어지지 않았던 아름다운 나비, 사고로 우리 안에 떨어진 세 살 남자 아이를 보듬어 안은 어미 고릴라, 퇴직하는 동물원 원장의 눈물을 두 손으로 닦아준 오랑우탄…. 크든 작든 동물과 교감을 나눠본 사람이라면 망설임 없이 이를 당장 실행에 옮길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우리의 온정을 불러내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름 붙여준 동물

먹을 수 있을까?

 

우리가 동물에게 온정을 베풀게 되면, 이는 사람이든 다른 동물이든 모든 생명체에게 전염되기 때문이다. 온정이 온정을 부르는 것이다. 동물에게 온정적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온정적이지 않은 경우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2008년 11월, 캘리포니아 주의회는 “농장에서 사육되는 동물의 복지를 개선”한다는 취지의 개정안 2호를 63퍼센트의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이로 인해 이제는 상처 입은 암퇘지가 옴짝달싹 못한 채 새끼를 낳는 임신용 우리, 우유 생산을 위해 갓 태어난 송아지를 어미 소와 격리시키는 사육 상자, 비좁은 우리에 닭을 채워 넣은 배터리 케이지 등 공장식 형태의 밀집된 사육 공간에서 자행된 비인도적인 관행의 일부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이 법안은 캘리포니아 주에서 사육되는 2천만 마리의 농장 가축들에게 효력을 미친다. 다시 말해, 이 법안에 힘입어 동물들은 일어서거나 다리를 뻗고 몸을 돌리고 편안하게 누울 수 있는 공간을 제공받게 된 것이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동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 체계를 바꾸는 데 있어 지역적인 문화의 다양성과 차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절대 강요를 통해 변화를 이끌어내서는 안 되며, 또 그럴 수도 없다고 설명한다. 한편, 무언가를 반대하기보다는 무언가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한 변화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서, 무조건 육식에 반대하기보다는 개별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자는 운동에 동참해 볼 것을 강권한다.

 

지은이가 바라보는 인간은 본래 온정이 많고 선량한 동물. 그는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너무나 멀찍이 우리를 분리시키는 바람에 그 소중한 가치를 상실했으며, 이는 동물을 포함한 모든 존재에게 불행을 안겨준 결과를 불러왔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모두 온정의 발자국을 넓혀가는 데 동참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그의 이 목소리는 대규모 가축 살처리를 감행하고 있는 이 시점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