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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속 그리움이어라사회 2011. 5. 9. 11:04
[사랑 때문이다]
<지데일리> “지금 사람들은 자기 근본을 잊은 채 살고 있다. 돈이 하느님이다. 4대강 사업, 재개발, 구조조정, 이게 단 돈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 문정현 신부
‘격동의 1980년대’. 이 시기를 보낸 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싸웠다. 고통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스물넷의 짧은 삶을 치열하게 고민하며 젊은 ‘신부’로 살았던 청춘 조성만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난 1987년 6월항쟁 당시 서울 거리와 명동성당에서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던 조성만은 그해 12월 대선에서 부정선거를 목격하고 투표함을 지키기 위해 구로구청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그는 서울올림픽을 앞둔 1988년 5월15일,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에서 5․18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성당 벗들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바라본 후 할복 투신했다. 스물넷 청춘의 생명은 그렇게 꺼져갔다.
그의 유서에는 한반도 통일, 미군 철수, 군사정권 퇴진, 서울올림픽 남북 공동 개최 등을 요구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가 몸을 던진 자리엔 작은 표지석 하나 없다. 명동성당과 가톨릭 주교단이 거부했기 때문이다.
*사랑 때문이다, 송기역, 오바이북
평전 <사랑 때문이다>는 열사 조성만의 삶과 죽음, 그리고 1980년대 정치·사회·문화적 변화를 배경으로 고민하고 흔들렸던 청춘들의 삶과 사랑, 투쟁을 다루면서, 촛불세대인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바치는 ‘청춘보고’다.
아울러 조성만 자신이 그토록 이루고 싶었던 꿈인 한 신부의 삶에 관한 표식, 1980년대를 살아간 청춘들의 표식이다.
지은이 송기역은 “이 책을 쓰면서 김수영의 시 <푸른 하늘을> 가운데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의 그 ‘피의 냄새’를 생각했다”면서 “민주주의의 길에서 자신을 기꺼이 투신해 고통을 받아들였던 그 냄새를 기억한다”고 말한다.
1984년 대학에 입학한 조성만은 지하서클과 명동성당 가톨릭민속연구회에서 활동했다. 이 시기에 그는 인간의 자유와 해방이 과연 무엇이고 어떤 모습인가를 본질적으로 질문하며 치열한 고민을 했다.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이었던 그의 가슴속에 이처럼 뜨거운 불덩이를 품고 있으리라는 것을 당시엔 누구도 알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신부의 삶을 꿈꾸던 조성만에게 점점 보수화되는 교회의 모습과 고통받는 민중의 모습은 외면하기 힘든 현실이었다.
그가 사회적 자아에 눈을 뜨게 된 데에는 두 가지 계기가 있었는데, 전주 해성고에 입학한 해에 광주민중항쟁을 겪었던 일이과 고교 시절 중앙성당에서 만난 문정현 신부의 삶이었다.
용기 있게 정부와 권력자를 비판하는 문 신부의 모습에 그는 큰 감동을 받았고, 이때 가슴에 품은 신부의 꿈은 죽는 날까지 변하지 않았다.
체제가 인간을 돈의 노예로 많이 변화시키는 과정이 너무나 화가 나고 그 인간에 대하여는 너무나 불쌍한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민중’이 그러한 모습을 보일 때는 미칠 지경이다. (…) 사랑 때문이다. 내가 현재 존재하는 가장 큰 밑받침은 인간을 사랑하려는 못난 인간의 한 가닥 희망 때문이다. 이 땅의 민중이 해방되고 이 땅의 허리가 이어지고 이 땅에 사람이 사는 세상이 되게 하기 위한 알량한 희망, 사랑 때문이다. - 조성만의 일기 중에서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치열하게 고민하던 조성만이 자신의 온몸을 던짐으로써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보다 ‘사랑’이었다.
그는 왜곡된 역사를 비롯해 인간을 돈의 노예로 변화시키는 사회 구조에 참담함을 느꼈고, 결국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사랑 때문이다’라는 결론이 내리게 됐다.
‘인간을 사랑하고자 했던 한 인간’ 조성만의 삶은 ‘인간을 향한’ 치열한 순례의 과정이었다.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려는 ‘인간을 향한’ 길은 결국 당시 상황 속에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 군사정권 반대, 미군 철수 등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과 투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의 죽음을 전후로 대중적인 통일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됐고, 1989년 임수경 씨와 문규현 신부의 방북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문정현 신부는 이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임수경과 문규현은 ‘통일의 꽃’이 아니라 ‘조성만의 꽃’이다. 성만이가 그렇게 꿈꾸던 일이 두 사람을 통해 피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1989년 문규현 신부가 방북하게 된 것은 조성만의 영향 때문이었다.”
명동성당 가톨릭민속연구회 회원들이 중심이 된 조성만 추모모임 ‘성만사랑’은 매년 5월15일 기일이 되면 추도식과 함께 광주 망월동 묘역을 참배하고 있다.
그를 기억하는 천주교 단체들은 그날의 고통과 의미를 간직하기 위해, 그가 투신한 자리에 표지석을 세우려 하고 있다.
또 조성만의 죽음을 ‘정치적 순교’로 규정하고, 순교자로 공식 지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명동성당과 천주고 주교단의 반대로 아직은 현실화돼지 않은 상태다.
조성만을 ‘신앙의 스승’이라 부르며 23년 동안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온 문정현 신부는 “언젠가 그가 떨어진 자리에 작은 돌이라도 새겨 흔적을 남기고 싶다”며 마음 속 그리움을 감추지 못한다.
손정우기자 gdaily4u@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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