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벗어나 단체, 도서관, 백화점, 박물관 등에서 주최하는 인문학 강연에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인문 경영’ ‘소통의 인문학’ ‘도심 속 인문학’ ‘생활 속의 인문학’…. 우리는 지금 인문학 전성시대에 살고 있다.

 

인문학을 통해 삶의 가치를 찾겠다며, 다양한 인문학 연구공간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인문학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경영학이나 자연과학에서도 인문학과 접목된 연구가 눈에 띈다. 인문학이 전문 연구자들만의 전유물이었던 시대는 지나간 것이 분명하다. 이제 인문학은 모든 학문과 계층을 넘나들며 삶에 활력소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문학의 미래, 월터 카우프만, 이은정, 동녘

 

그렇다면 실제로 인문학은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하고 깊어졌을까. 우리가 이 질문에 선뜻 답할 수 없는 이유는 자명하다. 인문학이 보편화, 대중화되는 동안 정작 인문학의 발본지인 인문대학이 자리를 잃어갔기 때문이다.

 

지난 9월 숙명여대 여성학통합대학원이 마지막 졸업생을 배출했다. 대학원생 정원이 줄어 더는 학과를 유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건국대도 이미 2005년 전공자가 줄어들었다는 이유로 독문과와 불문과를 통합했고, 동국대 독어독문학과도 같은 이유로 2010년부터 신입생을 받지 않았다.

 

대학 밖에서는 인문학이 유행하지만, 정작 연구의 근원지인 대학에서 인문학은 점점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취업이 잘 되지 않는 비인기 학과의 수업은 폐강되기 일쑤고, 인문대학원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줄고 있다.

 

정부는 대학에 연구소를 만들고 프로젝트 진행비로 수많은 비용을 지원하지만, 막상 인문학 박사학위를 받은 졸업자들은 안정된 직장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다시 말해 인문 ‘대학’ 즉 인문학 연구자들이 종사하는 공간과 인문학 분야를 가르치고 연구하는 사람들의 위기인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와 지식인의 종말을 한탄하는 목소리가 인문학의 유행과 공존하는 우리 사회. 이러한 상황에서 인문학과 관련한 종사자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좀 더 정확히 말해 인문학은 왜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것일까. 인문학 교육 제도와 인문학을 가르치는 지식인들은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

 

인문학이 표류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며, 이에 대한 비전을 꾸준히 제시했던 대표적인 인문학자인 월터 카우프만이 쓴 <인문학의 미래>는 인문학 대학의 현실을 읽어내는 것을 시작으로 인문학 교육의 목표, 비판적인 독서 방식, 종교 교육과 학제 간 연구의 중요성을 담고 있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논의의 탄탄함을 위해 인문학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네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통찰가 유형, 사변가 유형, 저널리스트 유형, 소크라테스 유형이 바로 그것인데, 그는 대학에 무엇보다 토론과 비판능력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소크라테스 유형이 필요하다고 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유형이 우월하다는 가치판단이 아니다. 주로 학교에서 교육을 담당하며 특정한 학파에 속해 연구를 하는 사변가 유형만이 넘쳐나면서 벌어진 인문학 대학의 현실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대학은 더 이상 인문학을 왜 가르쳐야 하는지,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연구자들은 아주 좁은 분야에만 몰두하거나, 유행하는 이론을 따라가며 글을 발표하느라 바쁘다. 그러면서 비전을 가진 괴테와 같은 ‘통찰가 유형’이나 ‘소크라테스 유형’의 학자들은 대학에 남기가 힘들어졌고, 자연히 학생들도 인문학을 배우며 인간의 가치나 대안에 대해 고민하는 기회를 얻기가 어려워졌다.

 

지은이의 유형 분류에 따르면, 저명하다고 여겨지는 학자들도 비판 대상이 된다. 가령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의 주요 개념인 ‘악의 평범성’은 당시 끊임없이 뉴스에 등장하던 것으로, 그 책은 순간적인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저널리스트 유형의 저작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인문학의 위기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람은 바로 인문학자이며, 이 위기를 가장 소리 높여 경고해야 하는 사람들도 바로 인문학자다. 인문학의 위기가 온전히 대학교육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인문학자들이 자신의 역할을 방기했을 때 곧 인문학의 위기가 찾아온다는 지은이의 설명이다.

 

인문학엔 인류의 비전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인문학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는 서평, 번역, 편집은 어떨까. 과연 인문학의 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인문학자들의 글을 받아 출판하는 편집자나 출판사, 그들의 책을 소개하는 잡지사는 인문학의 미래를 움직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게다가 무엇을 번역하는가의 문제는 곧 출판사의 출판 목적과 결부되고, 어떤 책을 서평으로 다룰 것인가의 문제 역시 편집자의 판단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에 이 세 가지 역시 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카우프만은 우선 다양한 잡지의 신간 서평에 숨어 있는 학파들 간의 권력을 읽어낸다. 서평은 강력한 홍보방법이자 저자에게는 자신의 생각을 펼칠 수 있는 장이라는 점에서 정치적인 힘이 있다.

 

그렇지만 학파들 간의 세심한 의견차를 읽어내기 힘든 독자들에게는 잘못된 정보를 제공할 수도 있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또 동일한 고전을 각기 다른 출판사에서 반복해서 출간하는 현상, 자신의 논문 주제임에도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번역본에 의존해서 글을 쓰고 발표하는 상황, 비판적으로 가려내지 않고 저자의 모든 전작을 전집으로 담는 출간 방식에 쓴소리를 가한다.

 

지은이는 기획자와 번역자는 책을 왜 출간해야하는지 독자들에게 분명하게 밝혀야 할 것과 이러한 작업이 고전을 보존하고 육성하는 인문학의 역할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카우프만에 따르면 인문학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는 크게 네 가지다. 인문학을 가르치는 것은 곧 위대한 고전을 보존하고 양육하는 일이다. 또한 학생들에게 다른 대안을 공부하도록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 과정에서 비전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마지막으로는 비판 정신을 길러주기 위해서다.

 

기업형 대학, 지식인의 실종, 획일화된 목표와 같은 문제가 오랫동안 지속된 지금 우리 대학에서 카우프만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의 말처럼, 인문학의 미래는 곧 인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