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지데일리] ‘케인스’ ‘케인스주의’ ‘케인시언(케인스주의자)’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반면, 시대를 초월한 ‘진짜 케인스’를 아는 사람은 또 얼마나 있을까?


케인스를 위한 변명ㅣ피터 클라크 지음ㅣ이주만 옮김ㅣ랜덤하우스 펴냄 최근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등의 채무위기로 인해 케인시언(케인스주의자)과 비(非)케인시언 사이의 공방전이 뜨겁다. 지난 2008년 월가의 주가 대폭락 사태 이후 각종 구제금융 정책과 경기부양책이 이어지면서 탄력을 받았던 케인스주의가 최근에 힘을 잃은 것이다. 불과 몇 달 전 G20(주요 20개국)의 재무장관이 한목소리를 내며 케인스를 외쳤던 것과는 상반된 분위기다.


≪케인스를 위한 변명≫에서 피터 클라크 교수는 최근 3년간 케인스주의에 대한 호평과 혹평의 극단적 양상이 비단 어제오늘 일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1930년대 경제대공황 이후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널을 뛰는 케인스에 대한 세간의 태도는 2008년 미국발 서브프라임 사태와 최근의 남유럽 채무위기에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케인스는 1920년에 <평화의 경제적 귀결(The 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이라는 첫 책으로 이름을 알린 이후 경제 역사상 단 한 번도 존재감을 잃은 적이 없었다. 지은이는 이 책을 통해 케인스에 경의를 표하며, 아무런 자기변론을 할 수 없는 죽은 경제학자를 대신해 그동안 쓴 누명을 벗겨주고자 한다. 여전히 뜨거운 이슈인 케인스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그가 살았던 시대와 그의 삶, 그리고 그가 이론을 끌어냈던 사유방식을 살펴보면 오늘날에도 적용할 수 있는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케인스와 그의 사상은 그가 존재했던 역사와 문화의 자양분을 먹고 자랐다. 때문에 이 책은 실제 케인스의 사유를 이끌어낸 20세기 영미 문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가 자랐던 가정환경, 청년 시절을 보냈던 블룸즈버리 그룹, 언론에서의 그의 영향력과 시대적 배경 등을 통해 케인스에 대해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케인스는 맥밀런 위원회에서 “저는 실업 구제책으로 제시한 정책을 모두 정당하게 평가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드렸다시피, 구제책 하나하나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했던 일을 대체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그는 자신이 선호하는 정책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각 정책과 실업의 관련성을 성심성의껏 고려하여 최선의 대책을 강구했다. 이런 태도는 모든 대안을 고려해볼 가치가 있다는 그의 오래된 견해와도 일치한다. 또한 조건이나 상황이 바뀌면 하나의 이상에 교조적으로 집착하기보다는 차선책을 찾아야 한다는 케인스의 주장과도 일치한다. 그리고 물론 이는 케인스에게 일관성이 없다는 혐의를 적용하며 그의 평판을 떨어뜨리면서 즐거워한 비평가들에게는 하나의 선물이기도 했다. 케인스는 맥밀런 위원회에 속해 있으면서 1930년에는 정부에서 새로 조직한 경제자문위원회(Economic Advisory Council: EAC) 위원으로도 임명되었다. 경제자문위원회 포럼에서도 케인스는 다른 위원들과 함께 다양한 정책안을 검토했다. 열린 태도를 지녔던 케인스는 램지 맥도널드 수상에게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다.

“나의 독특한 관점이라면 아무래도 어느 분기에 제시했든 간에 실용적인 구제책들은 모두 찬성한다는 것입니다. 그중에는 물론 더 나은 정책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방향을 제대로 설정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내린 결론은 타성에 젖은 장기적 전략을 경멸하는 견해와도 일치한다.

“그러니까 이들 구제책을 차례차례 퇴짜 놓는 부정적인 태도를 저로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193~194쪽]:::


책에 따르면, 케인스의 가문은 기품 있고 검소한 지식 귀족 계층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생전과 생후에 누구도 넘보지 못할 만큼 경제학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한 그가 실제로는 정식 경제학 학위 하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경제학을 가르치던 아버지,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 에드워드 포스터 등 대문호들과 서로의 생각을 치열하게 공유했던 블룸즈버리 그룹 등은 그에게 내재된 경제학자로서의 천재성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이 책은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In the long run, we are dead)”라는 유명한 말로 대표되는 케인스의 경기부양 정책이 나오게 된 역사적 배경을 소개한다. 1930년대 대공황 시기에 뉴딜정책에 영감을 주고 전후 세계 재건에 기여했던 그의 정치적 활동들과 정책입안자로서의 업적을 이야기한다.


:::경제위기의 한복판에서 케인스는 관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바뀌었음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정치인이 일관성 없다는 평가를 듣는 것은 최악의 비난에 속하므로 정치인의 대부분은 생각이 바뀌어도 시치미를 떼게 마련이다. 정치판에 들어온 케인스에게도 똑같은 기준이 요구되었다. 어쨌거나 그는 192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자유무역 신봉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1930년에 와서 영국이 경제적 위기에 처하자 태도를 바꿔 관세의 적절성을 감안한 정책 조언을 내놓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1931년 3월, 케인스는‘수익 관세를 위한 제언(Proposals for a revenue tariff)’이라는 제목의 기사를《뉴 스테이츠먼》에 실어 공개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드러냈으며 이 글은 그해 말에『설득의 에세이』에 포함되어 출판되었다. 그가 옹호한 것이 수익성을 위한 관세였든 혹은 보호무역을 위한 관세였든 사람들이 보기에 그 차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듯하다. 더욱이 그는 1933년에 ‘국민적 자급자족(National selfsufficiency)’이라는 제목으로《뉴 스테이츠먼》에 글을 올려 비난을 더욱 악화시켰다. 기사에는 일관성 없는 케인스의 견해를 드러내는 증거들이 넘쳐났고 그는 변절자로 지탄받았다. 케임브리지에서 전해오는 말로는 이 모든 비난에 맞서 케인스는 핵심을 찌르는 질문 하나를 던지며 맞대응했다고 한다.

“사실이 바뀌면 저는 생각을 바꿉니다. 당신들은 어떻게 하시나요?” [120~122쪽]:::


작가, 언론인, 정치가, 공무원 등 분주한 삶을 살았던 케인스. 그러나 역시 경제학자로서 케인스의 위치는 가히 거장이라 부를 만하다. 케인스의 <일반이론>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과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함께 경제학계의 3대 경전이라 불릴 만큼 혁명적이다.


<일반이론>에서 케인스는 그동안 십계명과 같은 진리로 여겨졌던 ‘합리적 경제인’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균형’이라는 관점의 비현실성을 꼬집었다. 그는 ‘야성적 충동’이라는 개념을 통해 비합리적 인간 행위가 어떻게 경제를 움직이는지에 초점을 둬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현실 경제를 설명했다. 이 개념은 훗날 행동경제학이라는 새로운 경제학의 원류가 돼 2008년 월가에서 펼쳐진 광기 어린 버블 드라마의 원인을 가장 설득적으로 설명하는 도구가 됐다. “한 국가의 자본 발전이 카지노 활동의 부산물이 되면 그것은 잘못될 가능성이 높다.”는 그의 말은 사후에도 우리에게 제공하는 통찰의 무게감을 실감할 수 있게 한다.


이 책은 케인스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리기 이전에 그의 사상과 삶이 이뤄진 배경에 대해 이해하도록 하며 현실에서 그의 이론이 어떻게 새로운 모습으로 적용될 수 있을지 답을 제공한다.


ㅣ손정우 기자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