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선택은 역사를 한 방향으로 혹은 다른 방향으로 단지 조금 움직일 수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자신의 결정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그 누구도, 그 자신도 알지 못한다. 때문에 우리는 대통령을 평가하기에 앞서 그들의 생각을 들여다보고, 그들이 처해 있던 상황을 재검토하고, 그들에게 어떤 선택권이 있었는지 생각해보며, 그들이 그렇게 행동한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진=대통령의 오판ㅣ토머스 J. 크라우프웰 M. 윌리, M. 윌리엄 펠프스 지음ㅣ 채은진 옮김ㅣ 말글빛냄 펴냄 ≪대통령의 오판≫은 미국 대통령들의 잘못된 의사 결정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봄으로써, 처음에는 희망적으로 보였던 정책이나 행동방침이 결과적으로 최악의 선택이 된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피그스 만 침공 실패 이후 쿠바와 미국 사이의 적대감은 더욱 심해졌다. 쿠바는 소련과 동맹을 맺었고, 미국은 쿠바를 경제적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방침을 계속 유지했다. 소련 총리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미국의 피그스 만 침공 실패가 케네디의 나약함과 미숙함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이러한 평가는 1962년 4월 비엔나 정상회담에서 케네디를 만난 후 더욱 확고해졌다. 이 회의에서 흐루시초프가 케네디에게 보인 태도는, 서베를린을 서구 열강에서 잘라내겠다는 위협처럼 보였다. 6개월 사이 흐루시초프는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를 설치하고 있었다. 세계를 전면적인 핵전쟁 위기로 몰아넣는 행위였다.

미사일 위기에 직면해서 케네디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소련은 한 발 물러서 쿠바의 핵무기를 제거했지만 쿠바와 미국 사이의 긴장은 40년 이상 계속되었다. 정치 비평가들과 역사가들은 피그스 만 침공 실패로 쿠바에서 카스트로의 지배력이 강화되었다고 주장했다. 체 게바라도 그렇게 생각했다. 1961년 8월 우루과이에서 열린 미주기구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 회의에서 그는 케네디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플라야 히론Playa Giron(피그스 만 침공 당시 상륙 지점)에서의 일은 매우 감사드립니다. 침공이 있기 전까지는 혁명이 미약했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해졌습니다.” (존 F. 케네디):::


 

최근까지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인 후보자 사망 후 50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사람의 일생과 업적에 관한 평가를 시작했다. 바티칸은 수세기에 걸친 경험을 통해 종교적으로 명성 높은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엄청난 감정의 폭발이 자연스럽게 뒤따른다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랬다. 그러나 50년이 지나 모든 흥분과 과장된 반응이 가라앉고 나면, 성인 후보자의 삶을 조사하는 이들은 마치 학자처럼 신중하고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평가에 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미국의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나거나 세상을 떠날 때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워싱턴의 통신원들과 정치 전문가들, TV 뉴스 해설자들은 전임 대통령 행정부의 성공이나 실패에 관한 개략적인 성명과 인용할만한 어록을 앞 다투어 쏟아낸다. 이는 24시간 뉴스의 구성에는 즉석에서의 평가와 그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인을 선정할 때와 마찬가지로, 대통령의 성공과 실패를 평가하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언제나 역사가 모든 것을 말해주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1953년 백악관을 떠날 때 그의 지지율은 약 22퍼센트까지 떨어져 있었다. 차기 대통령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조차 그를 무시했다. 아이젠하워는 취임 전 백악관에서의 오찬 초대를 거절했고, 물러나는 대통령과 영부인을 찾아가 인사로 예를 표하는 관행도 따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백악관 밖에 세워진 차 안에 앉아 트루먼 대통령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20년 후 트루먼에 대한 평판은 완전히 달라졌다. 한때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의 불운한 후임자이자 2차 세계대전 이후 정계에서 전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 인물로 비웃음을 사던 그가 이제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싸운 혈기왕성하고 정직한 시민이자 시대에 앞선 사람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민간인 피해에 대한 추정은 제각각이었다. 2007년 이라크 보건복지부는 2003년 2월에서 2006년 6월 사이 전쟁과 관련된 원인으로 사망한 인구를 15만 천 명으로 집계했다. 영국 의학 잡지 란셋Lancet 지에 실린 조사에서는 2003년에서 2006년 사이 60만 명이 사망했다고 추정했다. 한 여론조사 기관은 이 전쟁으로 적어도 94만 6천명에서 1백 3만3천명이 무참히 죽었다고 발표했다. 또 한 조사에서는 이라크인 개개인에게 전쟁으로 희생된 민간인 친척이나 친구가 있는지 물었는데, 응답자의 80퍼센트가 그렇다고 답했다.

후세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요란한 재판이 끝난 후, 한때 막강한 권력자였던 그는 2006년 12월 30일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지른 죄로 교수형을 당했다. 이에 대해 박수를 보내는 이들도 있었고, 분노하는 이들도 있었다.

2005년 12월, 마침내 부시는 전쟁의 동기가 되었던 일부 정보들이 “잘못된” 정보였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여전히 부시는 이 전쟁이 가치 있는 일이며 후세인을 실각시키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주장했다. 더 다른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다 해도 그는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침묵을 지키던 충성스러운 군인출신 파월은 2007년 마침내 자신이 UN에서 했던 연설에 대해 사과했다. 그는 바바라 월터스Barbara Walters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입수했던 정보는 부정확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언제까지나 나의 오점으로 남을 것입니다.” (조지 W. 부시):::


 

이 책은 조지 워싱턴 시대의 위스키 폭동에서 조지 W. 부시의 이라크 침공까지, 18명의 대통령의 20개의 잘못된 정책이 미국의 역사를 어떻게 바꿔 놓았고, 심지어는 세계사에까지 미친 부정적인 결과에 대해 컬러 화보와 함께 그 생생한 역사의 현장으로 안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