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드스탁’은 록 음악에 관심 없는 사람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큼 유명한 이름이다. 1969년 8월 자유분방한 히피들이 농장에 대거 모여 발가벗고 춤추고 사랑을 나누며 음악을 즐긴 해프닝으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대중문화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순간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문화를 통해 세상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라는 거창한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사진=우드스탁 센세이션ㅣ마이클 랭, 홀리 조지-워런 지음ㅣ장호연 옮김ㅣ뮤진트리 펴냄 ≪우드스탁 센세이션≫은 그 대단한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꿈꾸고 준비하고 만들어나간 사람들의 분투기다.

 

1969년 8월 15일, 리치 헤이븐스가 ‘우드스탁 음악과 예술 박람회’의 첫 주자로 무대에 올라 맥스 야스거의 푸른 농장 들판에 모인 수십만 청중의 환영을 받았다. 사람들이 춤추고 마시며 서로 어울렸고, 끝없이 몰려드는 인파가 캠프를 차리는 것을 도왔다. 한적한 시골 들판 너머의 도로는 차들과 사람들로 완전히 막혔는데, 그중에는 페스티벌 행사장까지 오려고 며칠을 달린 사람도 있었다.

 

포크-블루스 스탠더드와 비틀스 노래를 열정적으로 노래한 리치 헤이븐스는 ‘자유’라는 후렴구를 활용해 즉석에서 노래를 지었다. 자유는 형제애와 사랑과 평화로 넘쳤던 기념비적인 이날 행사의 화합의 중심이 됐다. 이어지는 사흘 동안 몇 달, 길게는 몇 년간 꿈꾸고 계획했던 일이 실현됐다. 기적과 위기와 우연이 서로 맞물려 빚어낸 결과였다.

 

페스티벌 이야기는 마이클 랭에서 시작된다. 브루클린 벤슨허스트 태생으로 재즈 음악을 즐겨 들었던 그는 플로리다로 건너가 헤드숍을 열었다. 이어 지미 헨드릭스와 프랭크 자파 등을 데리고 자신의 첫 번째 페스티벌인 ‘마이애미 팝 페스티벌’을 개최했다. 1960년대 후반 우드스탁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는 전원적인 업스테이트 뉴욕에서 사람들이 모여 음악과 예술을 즐길 수 있는 페스티벌을 꿈꾸기 시작했다. 작곡가이자 음반사 중역이었던 아티 콘펠드를 만나면서 그 꿈은 구체화됐고, 이들은 두 명의 청년 사업가와 함께 우드스탁 벤처스를 설립했다.

 

‘우드스탁 센세이션’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그 사건의 실질적인 기획자가 바로 이 책의 지은이인 마이클 랭이다. 그는 보통 ‘우드스탁 4인방’이라고 하는 네 명 가운데 가장 핵심인물로 콘텐츠를 책임지고 전체 공연을 이끌었다. 아티스트들을 섭외하고 마을 주민들을 달래고 스태프를 직접 뽑은 마이클은 이 책에서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얽힌 이야기를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인다.

 

“솔직히 아티와 나는 우드스탁이 문화적 행사가 되기를 바랐다. 정치를 배제하자는 게 아니라 문화가 중심이 되어 문화만으로도 뭔가를 바꿀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우드스탁이 성공하면 그 자체가 가장 강력한 정치적 진술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이 책은 마이클이 어떻게 우드스탁을 기획하고 준비하고 열었는지 회고록과 구술사 형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뜨거웠던 8월의 그 주말이 물론 책의 중심이지만, 어떤 계기로 공연을 기획하게 됐는지, 스태프들과 공연을 도와준 수많은 사람들을 어떤 인연으로 만났는지, 그리고 공연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어떤 갈등과 난황을 겪었는지 들여다 볼 수 있다.

 

책에는 지은이가 어떤 생각으로 이 페스티벌을 기획했는지, 왜 이 행사가 그처럼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는지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지난 세월 동안 갈등이 많았다. 대학가에서 도시 빈민가에서 전국의 집회장에서 격렬한 충돌이 벌어졌다. 우드스탁에서 우리는 정치적 이슈는 잠시 내려놓고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며 평화로운 분위기를 한껏 즐길 생각이었다. 60년대를 살아오면서 내내 열망했던 세상을 우리가 만들 수 있는지 시험하는 기회였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내세우려는 정치적 주장이었다. 평화와 이해가 가능함을 증명하고 카운터컬처의 가치를 입증해 보이는 것. 평화와 음악의 3일이 될 터였다.”


 

책은 그러나 성공에 대한 미담만을 늘어놓지는 않는다. 50만 명의 청중이 들었다면 그 입장료만으로도 주최 측은 막대한 이익을 챙겼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행사는 150만 달러라는 큰 손해를 남긴 것으로 결산했다. 실패를 예견하는 구석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출입문과 매표소를 제때 세우지 못해서 입장료를 받을 수도 없었고, 야외행사를 준비하면서 교통체증과 우천 시 대비도 전혀 하지 못해서 행사장은 그야말로 난리천국이었다.

 

게다가 히피 예술가 두 명과 월스트리트의 반듯한 젊은이 두 명이 어쩌다가 의기투합한 결과는 시종일관 갈등의 연속이었다. 전례가 없었던 대규모 청중을 불러 모으는 행사의 공사장에 제대로 된 무대 기술자 한 명도 없었다. 처음부터 아마추어들에 의한, 아마추어들을 위한 행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상황은 좋지 못했다.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간 꿈꾸고 계획했던 일을 진행하면서 온갖 위기를 겪고 우연을 만나고 기적을 느끼며 우드스탁의 중심에 서기까지, 우드스탁으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수렁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이들에게 주목해야 할 이유는 역사적인 페스티벌이 되기까지 그들이 겪어 온 실패의 부분들 때문이다.

 

마이애미에서 헤드숍 사업으로 가진 것을 다 잃고, 또 페스티벌을 열었다가 빈털터리가 돼 뉴욕으로 돌아온 지은이가 이러한 상황에도 우드스탁을 꿈꿀 수 있었던 것은 젊은이들에게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시대, 그래서 낭만적인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기획했던 사람들은 이십대의 젊은 나이에 상상할 수도 없는 기회를 그들의 것으로 만들어 결국 위대한 역사를 만들었다.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우드스탁이 되기까지는, 실패에 굴하지 않고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이상을 현실로 구현해 가는 젊음의 유연함과 함께 문화를 통해 세상에 더 많은 이해와 공감과 신뢰를 만들겠다는 절실함이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미숙했음에도 불구하고 50만 청중이 하나 돼 공감할 수 있었던 구심점이었다.

 

우드스탁의 역사와 동행했던 카를로스 산타나는 이렇게 말한다. “우드스탁에서 내가 본 집단적 모험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어떤 의미를 띄고 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우드스탁은 그곳에 있었다. 만델라가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도, 모두들 2000년 새해를 축하했을 때도 우드스탁은 그곳에 있었다. 우드스탁은 지금도 매일 우리 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