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여름, 도쿄와 워싱턴 사이에는 일본의 대한제국 강점과 미국의 필리핀 식민지화를 서로 묵인하는 내용의 비밀협상이 분주히 진행되고 있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일본과 비밀협상을 벌이는 동시에 당시 사상최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정직한 중재자’ 역할을 자임했다.

 

사진_임페리얼 크루주ㅣ제임스 브래들리 지음ㅣ송정애 옮김ㅣ프리뷰 펴냄두 교전국은 그해 여름 포츠머스평화조약을 맺게 되고, 그 공로로 일 년 뒤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노벨위원회는 미·일 밀약에 대해 전혀 몰랐고, 밀약의 존재는 루스벨트가 사망한 후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루스벨트는 20세기초 아시아정책을 통해 미국을 제국주의의 거센 여울로 몰아갔다. ≪임페리얼 크루주≫는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를 단장으로 한 1905년 아시아 순방단의 궤적을 추적함으로써 당시 루스벨트가 추구한 아시아정책의 실체를 파헤쳐 나간다.

 

순방단의 비밀임무는 미국과 일본이 대한제국과 필리핀 강점을 서로 묵인한다는 밀약을 타결짓는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맞딸 앨리스를 동승시켜 비밀임무를 은폐하고,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호도하는 바람잡이 역할을 맡겼다.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한 순방단은 100일 동안 하와이, 일본, 필리핀, 중국, 대한제국 등을 돌며 제국주의의 추악한 비밀임무를 수행했다.

 

미국은 필리핀을 강점하는 과정에서 수십만 명의 민간인을 살상했고, 탐욕스런 선교사들을 앞세워 하와이 왕국을 통째로 강탈했다. 그리고 조미(朝美)수호통상조약에서 한 약속을 배신하고, 일본의 대한제국 침탈을 묵인하고 지원했다.

 

책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파견한 아시아 순방 외교사절단 80여명이 1905년 7월5일 샌프란시스코 항을 출발하던 날에서 시작된다. 사절단은 그때까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였고, 여러나라를 거치는 긴 여정이었다. 미국이 태평양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고 세계의 절대 강자로 부상하도록 만들기 위한 원정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루스벨트의 후임으로 제27대 대통령이 되는 육군장관 태프트를 비롯해 상원의원 7명, 하원의원 23명과 다수의 군인과 민간 관료들이 배에 타고 있었으며 기자들도 동승했다. 일행 가운데는 루스벨트의 딸인 21세의 앨리스도 포함돼 있었다. 그는 ‘앨리스 공주’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사절단의 꽃이었다.

 

이 ‘제국주의 순방(imperial cruise)’을 통해 루스벨트는 앞으로 수세대에 걸쳐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큰 영향을 미칠 중대한 정책들을 결정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는 약소국을 향해 미국의 힘을 휘두른 인물이었다.

 

대규모 사절단을 보내면서 루스벨트가 추구했던 정책에 대해 이 책의 지은이 제임스 브래들리는 “(루스벨트)가 휘두른 몽둥이가 남긴 상처들은 태평양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 중국 공산혁명, 한국전쟁,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긴장사태들을 일으킨 불씨가 되었다. 20세기 미국의 아시아 외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남긴 궤적을 따라갔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한일병합은 백인우월주의자 루스벨트와 가쓰라 일 총리, 태프트 미 육군장관의 극비 합작품이라는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 과정에서 여러 충격적인 역사적 사실이 자료를 통해 밝혀졌다. 일례로 한국민의 은인으로 불리는 제중원 의사 알렌 공사는 루스벨트가 조선을 일본에 넘기기 위해 보낸 척후병이라는 사실도 자료를 통해 드러났다.

 

루스벨트는 대한제국을 배신함으로써 아시아 대륙에 대한 일본의 영토 확장 계획에 파란불을 켜 줬으며 수십 년 뒤에 또 다른 루스벨트 대통령(프랭클린 루스벨트)은 전임 루스벨트가 행한 비밀협약의 결과로 빚어지는 피비린내 나는 처절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됐다고 지은이는 단정한다.

 

사절단은 샌프란시스코를 떠난 지 두 달 뒤 상하이에서 두 그룹으로 헤어졌다. 태프트 일행은 미국으로 돌아가고 앨리스 일행은 베이징을 거쳐 한국을 방문한다. 앨리스 일행은 9월19일 서울에 도착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한다는 요지의 포츠머스조약이 9월 5일에 체결된 날로부터 2주일 뒤였다. 일본은 한국 지배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상태였고 한반도 침략에 가속도가 붙게 됐다. 두 달 후 을사늑약이 체결돼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한다.

 

이 책은 일본의 대한제국 강점을 묵인한 미국의 비밀외교 내막과 역사적 결과를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