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사라진 황학동 청계고가도로 아래에는 벼룩시장, 도깨비시장으로 불리던 독특한 시장이 있었다.


사진_인생은 생방송ㅣ브랜드스토리 지음ㅣ멋진세상 펴냄.jpg 서울시민 치고 ‘황학동 벼룩시장’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설령 이름은 몰라도 골동품과 구제물건을 산처럼 쌓아놓고 각양각색의 상인들이 목청껏 손님을 부르던 청계천변 그 노점시장을 기억할 것이다. 아이를 위해 손때 묻는 스누피 인형을 사는 가난한 아빠, 진품 백자를 발견하고 기뻐하는 골동품 전문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놀이터이자 삶터였던 벼룩시장.


요강, 경대, 오래된 LP판, 고장 난 라디오, 민화, 고서적, 헌 옷, 심지어 반쯤 쓰다 남은 향수병과 어디에 쓰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전선뭉치까지, 연탄재를 내다놔도 팔리는 곳. 품목이 어찌나 다양했는지 ‘황학동 물건들로 탱크도 조립할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올 정도였다.

 

진짜 골동품이나, 절판돼 구할 수 없는 희귀책자가 발견되면서 황학동 벼룩시장은 골동품의 메카가 됐다. 굳이 골동품이 아니라도 어린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손때 묻은 생활용품들이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상인, 골동품 전문가, 예술가, 구경꾼들까지 몰려들어 시장은 늘 북적거리고 활기가 넘쳤다.


그곳에서 파는 물건만큼이나 흥미로운 것은 바로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집시처럼 살았다. 작은 차를 몰고 전국 각처를 돌며 진귀한 골동품부터 자질구레한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온갖 물건들을 내다놓고 팔았다.


그러다가도 시청에서 불법노점단속이 나오면 번개같이 물건을 싸 짊어지고 달아났다. 먼지 묻은 고물차에 재빨리 물건을 싣고 달아나는 상인, 물건을 압수당하고 통곡하는 상인, 경찰과 드잡이를 하는 상인…, 그 와중에 흥정을 채 못 마친 손님이 얼떨결에 상인과 물건을 옮기고 함께 달아나는 촌극도 벌어졌다.


그러나 그렇게 한바탕 단속이 휩쓸고 지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상인들은 다시 슬금슬금 모여들어 전을 펼쳤다. 고물차는 다시 제자리도 돌아오고, 상인들은 투덜거리면서 물건에 묻은 흙먼지를 털고, 얼떨결에 같이 도망갔던 상인과 손님은 흥정을 마무리 지었다. 그들은 ‘서울’이라는 대도시 한구석에서 살아가는 현대판 집시들이었다.


≪인생은 생방송≫은 청계천변에서 골동품과 구제물건을 팔며 집시처럼 떠돌던 풍물시장 상인들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를 담고 있다. 월남전 참전용사에서부터 드럼 치는 할머니, 할리 데이비슨 타는 할아버지까지, 매력 넘치는 서울 집시들의 인생을 접할 수 있다.


청계천 복원사업과 함께 노점상들은 생계의 터전이었던 그곳에서 떠나야 했다. 사람들은 벼룩시장의 집시 같은 상인들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서울 집시들은 건재하다. 신설동에 ‘풍물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성업 중이다. 온갖 골동품과 생활용품, 그리고 성인용 비디오도 그대로 있고, 집시처럼 떠돌던 상인들도 여전히 장사를 하고 있다. 심지어 상인대학을 만들어 마케팅 공부도 하고, 끼가 넘치는 상인들끼리 라디오 방송국까지 운영하고 있다.


베트남전 참전용사로 풍물시장에서 음악테잎을 팔고 있는 김영조 씨는 책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말 그대로 인생은 생방송이거든. 두 번 반복할 수가 없어. NG가 나면 나는 대로 가는 거야. 최대한 안 내려고 노력하면서 그대로 가는 거지. 내 인생도 참 NG가 많았지. 그래도 이제는 잘 풀려 나가는 것 같아. NG 났다고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 아니겠어?”


이 책은 곡절 많은 인생을 살면서도 낙천적이고 자유롭게 살아온 서울집시들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