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좋은 삶은, 과학과 기술을 한껏 활용하되 그것이 우리에게 자유롭고 합리적이며 온전한 정신을 주리라는 환상에는 굴복하지 않는 삶이다. 평화를 추구하되, 전쟁 없는 세상이 오리라는 희망은 갖지 않는 삶이다. 자유를 추구하되, 자유라는 것이 무정부주의와 전제주의 사이에서 잠깐씩만 찾아오는 가치라는 점을 잊지 않는 삶이다.”


사진_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ㅣ존 그레이 지음ㅣ김승진 옮김ㅣ이후 펴냄.jpg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의 원제인 ‘Straw Dags(지푸라기 개)’는 고대 중국인들이 제사를 지낼 때 신에게 바치기 위해 만든 희생물이다. 이 개는 제사가 끝날 때까지는 최고의 예우를 받았지만 제사가 끝나면 내팽개쳐졌다. 지은이 존 그레이는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인간의 오만과 편견이 지구를 위협하고 있으며 인간이 스스로를 자정하지 않으면 가이아(지구)가 자정 능력으로 인간을 ‘지푸라기 개’처럼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지은이는 인간을 ‘지푸라기 개’로 보는 관점은 단순히 인간 종(種) 중심주의를 공격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서구 문명의 핵심에 자리한 휴머니즘을 인간 종 중심주의를 지탱하는 원천으로 보고 휴머니즘의 핵심 관념인 ‘진보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허약한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낱낱이 파헤친다. 그 과정에서 인간과 세계에 관한 우리의 편견과 고정관념 모두가 비판의 칼날을 피해 가지 못한다.


휴머니즘은 인간은 동물과 달리 주어진 본성을 초월할 수 있으며 자기 운명과 환경을 통제함으로써 더욱 발전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존 그레이는 이러한 진보에 대한 확신이 경험적으로 증명된 바 없는, 맹목적인 종교적 구원의 교리와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확실하다. 불가능하기 때문이다”고 말한 테르툴리아누스의 비합리적 교리와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진보에 대한 신념은 과학과 철학, 종교와 도덕의 든든한 지지를 받으며 유대-기독교 전통 안에서 보존돼 왔다. 그러나 과학은 진보는 물론 진리에도 봉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 발전으로 등장한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늘 통제를 벗어나 우리 삶을 위협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인간의 이성을 과신하는 철학 역시 마찬가지다. 존 그레이는 특히 서구의 지배적인 철학 전통에서 세계의 관찰자이자 해설자로서 인간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선사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발견한다. 기독교의 일신론은 배타적이고 절대적인 도덕 원칙을 확립해 다양한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의 가능성을 차단해 버렸다. 또 도덕적 판단의 근거가 되는 자율성과 자유의지 역시 인간의 삶 대부분을 조건 짓는 우연과 필연 앞에서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


이렇듯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바람은 인간의 삶, 더 나아가 지구 환경 자체를 위협할 뿐이며 인간의 삶 자체도 우리가 진(眞) 선(善) 미(美)라고 생각해 온 것들을 배반하는 방향으로, 습관과 임시변통에 의해 좌우될 뿐이라는 게 지은이의 주장이다.

 

지은이는 “인간은 우연한 유전적 사고의 결과 지구상에 출현하게 된 고도로 약탈적이며 파괴적인 동물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인간은 ‘하찮은 호모 라피엔스(homo rapiens, 약탈하는 자)’일 뿐이라는 것.


지은이에 따르면, 서구 철학의 지배적인 견해는 이러한 인간의 실체를 무시하고 인간은 자기 운명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종이라는 식으로 스스로를 기만한다. 이에 따라 인간의 탐욕은 견제 장치를 상실해 왔다.


책은 “진보는 신화다. 자아는 환상이다. 자유의지는 착각이다. 도덕성은 일종의 질병이며 정의는 관습의 산물일 뿐”이라며 “목적의식적 삶에서 벗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책에서 지은이는 철학과 과학, 종교 경전과 문학 작품을 종횡무진하고 있다.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이론과 J. G. 발라드의 묵시론적 세계관, 그리고 장자의 ‘나비의 꿈’ 등에서 얻은 영감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사상의 향연을 통해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간명하다. 외면하고 싶지만 외면할 수 없는 인간과 세계에 관한 진실을 마주하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