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적으로 시장은 하나의 제도나 체제를 넘어 종교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사회는 유독 왜곡된 시장제도와 천민자본주의에 신음하고 있다.


사진_시장의 신화- 시장의 탄생ㅣ이용범 지음ㅣ생각의나무 펴냄.jpg 사진_시장의 신화- 자유주의 신화ㅣ이용범 지음ㅣ생각의나무 펴냄.jpg ≪시장의 신화≫는 한국 경제의 새로운 출발을 위한 고민을 담은 책으로, 지은이 이요범은 시장자유주의라는 신격화된 권력의 틀 속에서 자율성과 효율성 그리고 정의와 윤리의 문제를 살피면서,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시장’이라는 담론의 모든 것을 면밀하고 농도 짙게 담아낸다.


이 책은 시장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학문적으로 경제학을 다루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문학적으로 접근해 경제학을 살펴보면서 삶의 장(場)으로서의 ‘시장’을 이해하기 위한 우화집에 가깝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처럼 이미 시장경제체제의 일부로 결정지어진 현대인에게 ‘시장’은 받아들이고 적절히 대처해야 할 운명이다. 이처럼 시장은 생존의 공간인 동시에 우리의 의지를 실현해가는 공간인 것이다. 우리가 시장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장은 우리뿐만 아니라 수많은 현자들이 수천 년간 고민해 왔던 정의(justice)의 문제들이 응집돼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런 시장을 둘러싼 정의에 대한 명백히 다른 두 가지 입장이 존재한다. 두 세계관은 지난 수백 년 동안 논쟁을 거듭해왔지만, 어느 쪽도 완벽한 승리를 거머쥐지는 못했다. 두 진영의 대립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이들이 가장 첨예하게 맞붙는 곳이 바로 시장이다.


책에 따르면, 흔히 이 두 진영을 보수와 진보로 구분한다. 그렇지만 책에서는 보수 대신 ‘시장원리주의’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들에게는 시장주의, 시장근본주의, 시장숭배주의, 자유지상주의 같은 이름이 따라붙지만 시장원리주의라는 표현이 가장 중립적이다. 그러나 시장원리주의가 정치적으로 보수적 색채를 띤다고 해서 모든 보수주의자가 시장원리주의자는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진보’에게 붙일 이름은 마땅치 않다.

진보 진영은 오랫동안 ‘반시장주의’라는 오명을 안고 있었지만 반대자들이 찍은 낙인과 같은 이름이기 때문에 중립적인 표현은 아니다. 오늘날 시장 전체를 부정하는 진보주의자는 거의 없다. 설령 소수의 속류 마르크르주의자들이 있다 해도, 이들은 우리 사회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때문에 ‘반시장주의’는 정확한 표현도 아니고 실체도 없다. 오히려 ‘시장질서주의’라는 명칭이 진보 진영에 어울린다. 이들은 시장의 자유방임에 반대하며 인간의 이성이 시장에 개입하여 어느 정도 질서를 부여해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시장질서주의는 시장원리주의에서 주장하는 ‘자생적 질서’와 대립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지은이는 이 두 이념의 가운데서 사람을 보라고 주장한다. 극단적 대립을 그친 뒤, 보수화되고 권력화된 시장원리를 되돌아보자는 의미다. 책은 인간과 세계를 배제하지 않고 도덕과 정의를 되찾을 수 있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시장’을 바라보는 사상적 흐름의 두 가지 상반된 큰 줄기를 따라 폭 넓게 경제학이라는 큰 바다를 살피는 지적 경험을 풍성하게 안겨준다. 또 ‘시장의 신화’에 익숙해져 있는 현대인들이 세상과 타인을 바라보는 데 좀 더 공정한 시각을 제시하고 스스로를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