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일본이라는 나라는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다. 경술국치 100년을 즈음해 한일관계에 대한 다양한 조명이 시도되고 있지만, 한일관계를 진지하게 논구하려는 한국과 일본 양국의 지식인들의 입지는 자꾸 줄어드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사진_일본문화의 시간과 공간ㅣ가토 슈이치 지음ㅣ박인순 옮김ㅣ작은이야기 펴냄.jpg 일본 전후 대표적 교양인으로 알려져 있는 가토 슈이치. 그가 타계하기 전 발표한 마지막 작품인 <일본문화의 시간과 공간>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간에 대해서는 ‘지금’, 공간에 있어서는 ‘여기’가 집약된 ‘지금-여기’의 문화가 일본문화의 특징이라고 결론짓는다.


“과거는 물에 흘려 보낸다”, “내일은 내일은 바람이 분다”는 일본 속담에서 알 수있듯 일본 사회는 과거를 물에 흘려보내고, 미래는 당시의 풍향에 맡기고 사는 강한 추세를 갖고 있다. 지은이는 “현재 사건의 의미는 과거의 역사와 미래의 목표와의 관계에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목표에서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 결정된다”고 말한다.


지은이는 이러한 특징이 현재까지 일본인의 행동양식을 규정한다고 주장한다. 분석의 씨줄과 날줄인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축을 제시하기 위해 책을 통해 문학작품에 나타난 일본인의 시간의식, 대표적인 건축과 회화에 드러난 공간의식을 조명한다. ‘지금-여기’의 특징이 빚어낸 일본인의 행동양식은 근대 개항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역사적 사건들에 대비되면서 더욱 선명히 부각된다.


제2차세계대전 후 독일 사회는 ‘아우슈비츠’를 물에 흘려보내지 않았던 반면, 일본 사회는 ‘난징학살’을 물에 흘려보내려 했다. 그 결과 독일과 프랑스의 신뢰 관계는 ‘회복’되었으나, 일본인과 중국인 사이에는 신뢰 관계가 구축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지은이는 우선 미래와 과거를 지시하기 위한 조동사가 거의 없는 일본어의 시제에 나타나는 특징에서 일본의 객관적 시간보다 주관적 시간을 강조한다. 과거·현재·미래를 예리하게 구별하기보다도 현재에 과거와 미래에 집중하는 경향을 이야기한다. 또 전후 역사적인 예를 인용해 과거를 잊고, 실책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현재의 대세를 좇아 절박한 위기를 헤쳐 나가는 일본의 전통적 문화가 존재한다고 단언한다.


지은이는 이러한 일본인의 행동양식을 ‘대세순응주의’로 규정한다. 이 대세순응주의에서 ‘대세’란 집단 성원의 대부분이 특정 방향을 향하는 운동이다. 그 방향에 분명한 목표가 있는 경우도 있고, 목표가 확실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결국 그 방향의 옳고 그름이나 굳고 곧음과는 상관없이 다수가 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운동에 참가하거나 동조하여 부화뇌동하는 것이 대세순응주의다.


대세순응주의는 대세를 강화시키며, 대세를 따르는 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많은 사람들이 대세에 말려든다. 이로써 언제나 이른바 ‘눈사람 효과’를 동반한다.


지은이는 일본문화의 공간적 특징과 관련해 일본의 강한 집단 소속감을 지적하고 ‘외부’와 ‘내부’를 나누는 명확한 경계에 주목한다. “사적 생활공간의 비밀성은 다름 아닌 그 공간 경계의 폐쇄성이며, 마을의 경계나 국가의 경계가 가진 폐쇄성을 낳은 것과 동일한 사회 심리적 경향이 이를 낳았음에 틀림없다. 이는 가족의 일상생활을 외부로부터 차단하여 내외의 구별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이지, 가족 내부에서 개인의 사적 소망이나 행동을 존중한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과연 ‘지금-여기’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까?


지은이는 ‘전체에서 부분으로’가 아닌 ‘부분에서 세계로’라는 사고 과정을 특징화하며 ‘지금-여기’라는 일본문화의 특징이 어떻게 현재에 살아 있는지를 상세히 고찰한다. 일본인이 처한 조건에 대한 상세한 고찰은 결국 일본인이 과연 ‘지금-여기’로 압축되는 시간적 공간적 의식의 제약에서 탈출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도달한다.


지은이에 따르면, 공동체인 집단의 습관이 제도화되고, 엄밀하게 조직화된 때는 특히 17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에 이르는 약 300년간이다. 이 과정에서 축적된 사회적 불만이 표출된 상징적 사건이 ‘누케마이리’와 ‘오카게마이리’로 불리는 집단적인 이세신궁 참배(부모나 주인의 허락 없이 집을 나와 이세신궁을 참배하던 일)이며, 지은이는 이 사건을 ‘지금-여기’로부터 일본인이 탈출하는 양식의 전형이라고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