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 생태’ 소리치는 대신 그저 생태로 있는 삶, 대자연의 뭇 생명들처럼 활기 넘치는 본연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산 어머니의 품에서 나무를 심으며 조용히 살아가는 ‘걷는 사람’ 마사키 다카시.


사진_나비문명ㅣ마사키 다카시 지음ㅣ김경옥 옮김ㅣ책세상 펴냄.jpg 마사키 다카시의 생태ㆍ평화 에세이≪나비 문명≫은 나뭇잎을 먹어야 살 수 있음에도 나무를 걱정하는 애벌레와 그런 애벌레를 품어 안는 나무의 대화로 시작한다. 애벌레와 나무의 마음을 빌려 ‘나비 문명’을 전하면서 새로운 사유와 문명의 모습을 그린다. 파괴하고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근원이 되고 서로의 생명이 돼 순환하는 자연의 이치를 이야기하고 있다.


책은 애벌레가 나비가 돼 날아오르듯 인간중심주의에서 자연중심주의로, 국가주의에서 지구시민의식으로 한 차원 넘어서는 근원적 변화를 유도하고 있다. 인간의 존재 기반인 자연의 품으로 회귀하는 것에서 나아가 일본이 헌법 9조를 지킴으로써 전 세계로 확산되는 비폭력·평화의 전령으로 서길 기대한다.


일본의 생태ㆍ평화 운동가인 지은이는 이론이 아니라 삶의 여정에서 변화를 체득하고, 이를 실천해왔다. 지난 1980년부터 규슈 산속에서 차 농사를 짓던 그는 아내의 암 투병을 계기로 역시 병들고 지쳐 있는 자연의 상처에 눈을 뜨고, 치유를 기원하며 나무를 심기 시작한다. 숲을 가꾸는 과정에서 인간과 자연의 경계가 무의미해지면서 자신이 곧 자연 자체가 되는 인식의 전환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일본 헌법 9조(평화헌법)라는 사회 현실에 대한 관심으로 옮아가게 된다.


자민당 등의 주장대로 헌법 9조가 개정돼 일본이 군대를 보유하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고, 전쟁은 자연과 모든 생명을 파괴하게 되리라는 위협 앞에서 지은이는 ‘평화를 위해 나는 걷는 일은 할 수 있겠다’는 마음으로 2007년 일본 땅을 걷기 시작한다. 그의 생각에 공감하는 젊은이들이 참여하면서 한 사람의 걸음은 많은 사람들이 3개월여를 함께하는 공동의 순례가 됐고, 이는 ‘워크나인walk9(일본 헌법 9조를 지키는 걷기 운동)’이라는 이름과 조직을 얻게 됐다. 이어 이 순례는 지난 2009년 ‘워크나인-한국 순례’로 이어졌다. 그의 발걸음이 젊은이들을 감응시켜 연대의 순례로 이어진 것이다.


“한국에 가서 사죄하지 않고는 헌법 9조도 평화도 이야기할 수 없다.” 일제 강점기 강제로 끌려온 1만4000여 명의 조선인이 오키나와 전투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희생자들의 고통과 비탄이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걸어서 사람들과 만나고 바다와 만나고 산하와 만나 나무와 돌, 작은 새와 물고기(…)에게 인사하고 사죄하고 귀 기울이자’는 마음으로 바다를 건넌 그는 한일 두 나라 젊은이들과 함께 땅끝마을에서 임진각 DMZ까지 100일 동안 한국 땅을 걸었다.


몸과 마음이 이끄는 대로 나무를 심고 숲을 가꾸고 일본과 한국 땅을 걸으며 치유와 평화의 순례 길을 걸어온 지은이의 궤적은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는 근대 서구의 세계관에서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인식하는 동양과 인디언의 세계관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특정 국가의 국민이라는 정체성 대신 초록별 지구의 시민이라는 자각을 통해 전쟁에서 벗어나 평화로 가는 길과 닿아 있다.


책은 이러한 사유의 전환과 더불어 자연과 하나 되는 감각의 기쁨, 한국과 일본 워크나인 순례의 여정, 평화 헌법 수호, 한일 관계의 뿌리와 두 나라의 화해를 이야기하고 있다.


지은이는 “나무를 심고 나서 일어난 가장 커다란 변화는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있다는 감각, 자연으로 돌아가 안기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병든 자연을 생각하며 나무를 심은 그를 ‘산 어머니’가 기꺼이 안아주고 무릎 위에서 놀게 해줬다는 것이다. 그는 이 경험에 대해 “인간과 자연의 경계를 넘어 산 쪽으로 그라운딩(회귀)”했다고 표현한다. 자연에서 떨어져 나온 현대인이 자신의 존재 기반(그라운드)인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이 그라운딩이야말로 삶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비결이며, 위기에 처한 지구와 인류의 생존을 지속 가능하게 할 열쇠라는 것이 마사키의 전언이다.


숲과 바다와 길 위에서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하는 지은이는 이러한 생각의 근원을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보는 동양의 일원론적 세계관, 자연과의 일체감 속에서 소박하고 가난하고 따뜻하게 살아가는 원주민의 삶, 그리고 고통의 원인을 마음 깊은 곳에서 찾는 불교의 사유에서 찾는다. 이는 이원론에 바탕을 둔 서양 문명과 인간 중심주의가 전쟁과 환경 문제로 근원적인 위기에 처해 있는 지금, 다른 사고방식과 다른 문명에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는 이산화탄소를 줄이고 전기를 끄고 쓰레기를 줄이는 접근도 필요하지만, 그런 물리적인 대증 요법을 넘어서는 의식의 전환이 이뤄질 때 파멸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현대 문명이 침몰하는 배에서 스스로 내리는 결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다르게 생각하기, 생명과 평화의 관점에서 생각하기라는 지은이의 방식은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관계에 대한 사유에서도 새로운 지평을 보여준다. 첫 한국 여행 당시 동아시아 역사를 한반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을 경험한 지은이는 사료와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참고하며 두 나라의 역사와 관계를 성찰한다.


지은이가 보기에 한국인과 일본인의 뿌리는 하나다. 가야에서 건너온 천황가를 중심으로 야마토 조정이 형성되고, 7세기 신라에서 도망쳐 온 백제계 세력이 더해져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일본이라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일본을 세운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을 한반도에서 쫓아낸 신흥 세력을 상대로 한 본가의식이나 원한과 분노가 강했을 것이며, 자신들의 뿌리가 한반도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기에 <니혼쇼키>나 <고지키>의 기록을 통해 임나일본부설이나 귀화인설처럼 한반도의 역사를 왜곡했다. 이는 국학의 기초가 되고, 다시 황국사관과 메이지 유신 사상으로 연결됐으며 지금까지도 일본 국민에게 교육되고 있다.

 

“한일 문제는 남북 문제와 마찬가지로 한민족끼리의 싸움입니다. 우리는 2000년도 더 된 오래된 싸움을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은이는 이 카르마를 해소하기 위해 최근에 잘못을 저지른 일본이 먼저 사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전쟁을 목적으로 하는 군사력을 보유할 수 없다고 천명한 일본 헌법 9조를 지켜내는 것이 주변 국가, 나아가 전 세계를 향한 사과이자 새로운 문명을 여는 첫걸음이라고 말한다. 과거사 청산이나 평화 실현은 낡은 국가주의 아래서는 불가능한 만큼, 이는 국가 정체성으로부터의 탈피이기도 하다.


“일본인으로 살 것인가 지구인으로 살 것인가? 일본인이라면 무기를 갖겠지요. 지구인이라면 무기를 버리겠지요.” 지은이는 평화를 원하는 이들의 국가는 한국이나 일본이 아니라 지구이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구 시민의 정체성이라고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