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나라가 가난한 것은 그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이 일본 사람처럼 열심히 일하고, 독일 사람처럼 시간을 잘 지키고, 미국 사람처럼 창의적이기만 했어도 나라 전체가 부자가 됐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장하준 교수는 이런 생각이 틀렸다고 단언한다.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가난한 나라의 평균 국민소득을 끌어내리는 것은 빈곤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가난한 나라의 부자들이 모르는 게 있다. 바로 자기 나라가 못사는 이유가 빈곤층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장 교수는 이러한 이류를 설명하기 위해 버스 기사 이야기를 소개한다. “(스웨덴의 버스 기사) 스벤이 (인도의 버스 기사) 람보다 50배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그가 속한 스웨덴 노동 시장에 비슷한 일을 하는 인도 노동자에 비해 50배가 훨씬 넘는 생산성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스웨덴의 평균 임금 수준이 인도에 비해 50배라 하더라도 이것이 대부분의 스웨덴 사람들은 같은 업종의 인도 사람들보다 생산성이 50배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스벤을 비롯해 많은 노동자들은 아마도 숙련 정도가 인도 노동자들보다 더 낮을 것이다.”


개발도상국의 가난한 사람들은 대부분 기업가 정신도 충만하고 선진국의 가난한 사람들에 비해 생산성이 낮지도 않다. 그런데도 개발도상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스웨덴에서 일하는 사람들보다 50배나 낮은 임금을 받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장 교수는 스웨덴의 에릭슨이나 사브, SKF와 같은 세계 첨단 기업에서 일하는 최고 경영진, 과학자, 엔지니어 등은 인도에서 유사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 비해 수백 배 높은 생산성을 자랑하기 때문에 스웨덴의 국민 생산성 평균이 대충 인도보다 50배가 높아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부자 나라에선 기업 간의 협력이 가난한 나라보다 더 잘 이뤄진다. 심지어 동일 업종에 종사하는 기업 간에도 그러하다. 예를 들어 덴마크와 네덜란드, 독일 등 나라에서 낙농업이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정부의 도움을 받은 낙농업자들이 조합을 조직, 우유를 분리해 크림, 버터 등을 만드는 기계 등의 가공 설비에 공동으로 투자를 하고, 공동으로 해외 마케팅을 추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발칸 반도의 낙농업자들은 그 지역에 상당한 금액의 마이크로크레디트가 흘러들어 갔음에도 협력하지 않고 각자 일을 추진한 탓에 낙농업 부문이 발전하지 못했다.


장 교수는 자신의 가치만큼 임금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는 선진국의 특정 계층 사람들, 최고 경영진이나 과학자, 엔지니어들조차도 그만한 생산력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사회 경제적 시스템이 작동한 결과라고 말한다. 단순히 개개인의 능력이 뛰어나거나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지금처럼 생산력을 높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래서 그게 어떻다는 말인가? 선진국 사람들이 일한 것에 비해 보수가 높다는 사실이 그렇게 중요한가? 잘사는 나라에서는 여유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대가를 후하게 치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반면 저개발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걸맞은 대가를 치를 수가 없는 것 아닐까? 이에 대해 장 교수는 추상화된 모델 대신에 구체적인 현실을 통해 임금이라는 것이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보여 준다.


개발도상국 사람들이 가난한 것은 그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의 생산성이 낮아서가 아니라 그 나라 부자들의 생산성이 낮아서라는 점, 선진국 사람들이 일한 것에 비해 임금이 높은 것은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이민을 가로막는 엄격한 이민 정책 덕분이기도 하지만 최고 경영진이나 과학자, 엔지니어 중 일부가 대단히 높은 생산성을 발휘한 덕분이라는 점, 하지만 이들의 높은 생산성도 혼자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그 나라가 갖추고 있는 시스템이라는 오랜 역사적 유산에 힘입었다는 점이다.


“시장에 맡겨 두기만 하면 결국에는 모든 사람들이 타당하고 공평한 임금을 받게 될 것이라는 널리 알려진 주장은 신화에 불과하다. 이 신화에서 벗어나 시장의 정치성과 개인 생산성의 집단적 성격을 이해해야만 더 공평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개인의 재능과 노력뿐 아니라 역사적 유산과 축적된 집단적 노력까지 적절히 고려해서 개인의 노동에 대한 보상이 행해지는 사회 말이다.”



장 교수에 따르면, 가난한 나라에서는 가정부로 일하는 사람의 비율이 선진국에 비해 최소 10배 이상 높다. 그런데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선진국에서도 사정이 비슷했다. 하지만 가전제품과 상하수도, 전기·가스 등 설비가 발명·보급되면서 여성들의 가사 노동 부담은 대폭 줄어든다. 이에 힘입어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고 경제적 능력이 향상되면서 남녀평등이 촉진되고, 남아 선호 사상이 약해지는 등 사회와 가정 차원에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반면 인터넷은 우리가 여가 시간을 보내는 방식은 크게 바꿔 놓았는지는 몰라도 세탁기만큼 사회 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몰고 오지는 못했다. 우리는 인터넷의 속도에 경탄을 금치 못하지만 기실 속도 향상이라는 측면에서는 20세기 초에 등장한 전보가 더 위대했다. 전보는 배나 말에 의존하던 것에 비해 소식을 2500배나 빨리 전할 수 있게 했지만, 인터넷은 팩스에 비해 100배 정도 더 빨라진 것뿐이다.


사실 장 교수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따로 있다. 그것은 “단지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인터넷의 영향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있다.”라는 점이다. 이는 우리만 그러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본래 가장 최신의 기술이자 가장 눈에 띄는 기술에 현혹되는 경향이 있다. 조지 오웰은 이미 1944년에 ‘물리적 거리'가 파괴되고 국경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흥분하는 사람들을 비판한 바 있다. 당시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호들갑을 떨게 만든 기술은 다름 아닌 비행기와 라디오였다.”



이러한 결과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로 문제가 발생한다. 우선 왜곡된 시각으로 귀중한 자원이 남용된다. 일례로 인터넷에 매료되면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의 정보 격차(digital divide)가 문제되자 많은 기업이나 자선단체, 개인들이 개발도상국에 컴퓨터와 인터넷 설비를 갖추라고 많은 돈을 기부했다. 하지만 과연 정보 격차의 해소가 개발도상국들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일까? 개발도상국 아이들에게 노트북 컴퓨터를 한 대씩 마련해 주고, 시골 마을마다 인터넷 센터를 세워 주는 것보다는 우물을 파 주고, 전기를 넣어 주며, 세탁기를 구입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 비록 고리타분해 보일지 모르나 실제로 후진국 국민들의 생활을 개선하는 데에 더 보탬이 되지 않을까?


보다 중요한 문제는 최근 20년 사이 IT 기술이 급격하게 발전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현재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세상을 바꾸는’ 기술 진보의 산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이런 변화에 반대하는 것은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짓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국제화·개방화는 이제 불가피한 시대의 흐름이 되어 도저히 저항할 길이 없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각국 정부가 IT 기술 혁명에 홀려 ‘탈산업화 사회’의 시대가 왔다고 철석같이 믿고 이제 ‘구닥다리’ 제조업은 필요 없고 아이디어만 있으면 된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제조업을 홀대해 자국 경제를 약화시킨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 국경을 넘어 흘러들어 오는 자본과 노동, 상품에 대해 반드시 가해야 할 규제마저 일부 철폐한 것도 ‘국경 없는 세계’의 도래를 믿어 의심치 않아서였다.


하지만 100년 전의 세계는 1960년부터 1980년까지에 비해 통신과 운송 부문에서의 기술은 훨씬 뒤떨어졌으나 오히려 세계화는 월등히 진전된 상태였다. 결국 세계화의 정도(혹은 각국의 개방 정도)를 결정하는 것은 정치이지 기술이 아니다. 그런데 가장 최근의 기술 혁명에 사로잡혀 시각이 왜곡될 경우 이런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잘못된 정책을 펼치게 되는 것이다. 


세계 경제가 겪어 온 일들은 우연히 일어난 것도 아니고, 저항할 수 없는 역사적 흐름의 결과도 아니다. 최고 경영진과 은행가들의 수입이 엄청나게 늘어나는 동안 평범한 미국인들의 임금은 정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노동 시간은 계속 늘어났던 현상은 어떤 신성불가침한 시장의 법칙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장 교수에 따르면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경제학의 주류를 형성해 온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해를 끼쳤다. “경제학자들은 2008년 위기를 불러올 환경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사실 그들은 1982년 제3세계 채무 위기, 1995년 멕시코 페소 위기,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 1998년 러시아 위기 등 1980년대 초 이후 크고 작은 수십 개의 금융 위기에도 책임이 있다. 금융 규제 철폐와 무제한적 단기 이윤 추구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해 준 것이 바로 그들이다. 더 넓게 생각하면 그들은 경제 성장의 둔화, 고용 불안과 불평등 악화, 그리고 지난 30년간 전 세계를 괴롭혀 온 잦은 금융 위기를 불러온 정책을 정당화하는 이론을 주장해 왔다. 그에 더해 그들은 개발도상국의 장기 발전 전망을 약화시켰다. 부자 나라에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기술의 위력을 과대평가하도록 유도했고, 사람들의 생활을 점점 더 불안정하게 만들었으며, 경제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이 상실되는 현상을 모르는 체하도록 했고, 탈산업화 현상에 안주하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할 만한 경제 현상들, 즉 점점 심화되는 불평등, 지나치게 높은 경영자들의 보수,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극심한 빈곤 등은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의 본성과 각자 생산 기여도에 따라 보상받을 필요성을 감안할 때 모두 피할 수 없는 현상일 뿐이라고 주장해 왔다. 다시 말해 경제학은 그저 실생활에서 동떨어진 것 이상의 우를 범한 것이다. 지난 30여 년 동안 경제학이 한 짓은 사람들에게 실제로 해를 끼쳤다.”


자유주의 경제학이 이런 문제를 일으켰다면 이는 단순히 자유 시장 경제학이 잘못된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장 교수에게는 자본주의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인류가 만들어 낸 가장 좋은 경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경제학도 문제가 아니다. 경제학은 쓸모없거나 해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유 시장 경제학이다. 지금 문제가 된 자본주의는 흔히 신자유주의 내지는 자유 시장주의로 불리는 자유 시장 경제학이 만들어 낸 자유 시장 자본주의일 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운영하는 방법에는 자유 시장 자본주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장 교수는 역사를 돌이켜 보면 경제를 보다 잘 운영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데 도움이 된 경제 사상 학파들이 많았다고 이야기한다. 일례로, 2008년 가을에 세계 경제를 총체적 붕괴에서 구해 낸 것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찰스 킨들버거, 하이먼 민스키의 경제학이었고, 동아시아의 경제 기적을 이끌어 낸 경제 관료들이 아는 것은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리스트, 조지프 슘페터, 니컬러스 칼도, 앨버트 허시먼의 경제학이었고, 현대 기업과 보다 넓게는 현대 경제에 대한 우리의 이해 방식을 바꿔 놓은 것은 허버트 사이먼의 경제학이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고, 내가 말하는 ‘경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해서 의사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올바른 길을 선택하도록 요구하는 데에는 고도의 전문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날마다 전문적인 지식 없이 온갖 종류의 판단을 내리고 있다. 식품 공장, 정육점, 식당 등의 위생 기준이 어때야 한다는 것은 전염병 학자가 아니어도 모두 아는 사실이 아닌가. 경제에 관한 판단을 내리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주요 원칙과 기본적인 사실을 알고 나면 상세한 전문 지식이 없어도 좋은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이렇듯 장 교수가 지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 나오는 이야기 모두는 특정한 경제 문제와 관련돼 있으며 ‘경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는 그의 전제를 다양한 사례를 통해 하나하나 짚고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