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는 전 세계 경제를 뒤흔들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위기가 있었지만, 당시 위기만큼 전 세계적으로 심각하고 대단한 파장을 일으킨 위기는 없었다. 신자유주의 체제 총지배인 역할을 맡았던 그린스펀마저도 이 사태를 “세기에 한 번 있을까말까 하는, 1930년대 대공황에 버금가는 상황”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위기가 터지자 주요 국가 정부들은 전 세계적 차원의 국가 공조를 통해 이 위기에 대응할 필요성을 공감하고, 그 대응 주체를 ‘G20’으로 결정한다. 그렇지만 G20의 공조체제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더욱이 여기엔 이번 위기를 일으킨 주범(선진국)들이 포함돼 있고,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을 중심으로 정책을 펼쳐 나가려 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G20은 세계 경제 위기를 헤쳐 나갈 주체가 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번 경제 위기로 인해 약소국과 개발도상국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여기엔 도덕적 책임 문제가 개입된다. 개도국들은 미국인들이 자국 경제를 잘못 운영해 발생시킨 결과물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과 선진국들의 도덕적 책임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개도국에게 적절한 안정장치도 마련해주지 않은 채 자유화 정책을 강요했다. 이런 정책들이 결국 약소국과 개도국들을 엄청난 위험에 노출시켰다. 선진국들은 수천 억 달러를 투입해 자국민들을 보호하지만, 약소국과 개도국들은 재원 부족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없다.
광범위한 국제적 공동 대응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하지만 누가 앞장서야 할까? 미국은 아니다. 미국은 잘못된 정책을 펼쳐왔고, 이번 세계적 혼란을 야기한 주범이기도 하다. IMF 역시 마찬가지다. IMF는 적절한 자금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이번 위기를 감지하지도 못했다. 무엇보다 IMF는 미국과 여타 선진국들이 지배하고 있다. 그렇다면 G20은 어떨까? 그런데 전 세계에는 192개의 나라가 존재한다. 20개국의 모임이 나머지 172개 나라의 목소리에 정말 관심을 기울일까? G20이 세계 GDP의 75퍼센트를 차지한다 하더라도 결코 이들이 대표성이나 정치적으로 정당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또 그 밖의 나라들이 왜 이 모임에 끼지 못했는지 그 이유가 불분명하기도 하다. 즉 약소국과 개도국이 완전히 외면당한 모임인 것이다.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스티글리츠 보고서>에서 세계의 모든 나라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할 수 있으면서 정당성을 갖춘 국제기구는 ‘유엔(UN)’ 뿐이라고 말한다. 유엔에서만큼은 가난한 나라들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또렷하게 낼 수 있고, 형평성과 정의에 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때문에 전 세계 국가(G127)를 모두 대표하는 유엔이 세계 경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
2008년 유엔총회 의장 미겔 데스코트 브로크만은 이번 위기를 타개할 대안책을 마련하기 위해 국제 위원회를 소집했다. 이 위원회는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스무 명가량의 전문가들로 구성됐으며,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위원장을 맡았다. 여기에는 1997~1998년 동아시아 금융 위기 때 말레이시아가 IMF의 도움 없이 위기를 헤쳐 나가는 데 공헌한 제티 아크타 아지즈 전 중앙은행총재와 아시아통화기금(AMF) 창성을 제시한 일본의 사카기바라 에이스케 전 재무성차관, 중남미에서 단기자본의 유출입 통제 시스템 도입을 주도한 호세 안토니오 오캄포 등이 포함돼 있다. 이들은 위기가 미치는 여파를 파악하고 대응방안을 찾기 시작했고, 2009년 최종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렇게 ‘스티글리츠 보고서’가 탄생했다.
“세계적 차원에서 요구되는 제도적 장치의 개혁이 임의로 선출된 (그것이 G7, G8, G10, G20 등 무엇이든) 그룹에 의해 결정되면 절대로 안 된다. 세계 모든 나라들이 공조를 통해 다함께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러한 포괄적인 전 지구적 대응은 국제 공동체 전체의 참여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번 위기의 대응 기구는 지구상의 192개국(G192) 모두의 대표를 아울러야 한다.”
세계 경제 위기 이후, 여러 대안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신자유주의 체제, 즉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다시 고민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고, 미국 주도의 세계 경제를 다시 재편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즉 지금까지 나온 대안들은 모두 ‘반대’를 위한 것이었다. 그만큼 대안은 단편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티글리츠 보고서는 가장 현실적이고 유력한 대안들을 제시한다. 그것은 현 자본주의 내에서 시도할 수 있는 대안들이다. 또 ‘세계화’는 이미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정신이며, 이미 현실이 됐다고도 말한다. 보고서는 이런 ‘글로벌’한 시대 상황 속에서 어떻게 지속 가능한 성장을 도모하고, 더 민주적이며, 더 공정하고, 더 평등한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인지 모색한다. 금융, 통화, 국제기구, 세계체제, 거시경제와 미시경제의 문제들 등 경제 문제뿐만 아니라 기후, 에너지, 식량 문제까지 세세하게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보고서는 이런 체제를 만들 수 있는 민주적인 글로벌 거버넌스 체제를 만들어야 하며, 그래야만 세계적 공조를 통해 각종 위기를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세계 경제를 개혁하기 위한 기본 원칙들로 ▲시장과 정부 사이의 균형 회복 ▲더 명확해져야 할 투명성과 책임성 ▲장기적 전망에 조응하는 단기 행동들 ▲분배적 여파에 대한 평가 ▲세계 불균형과 비대칭성의 심화 방지 ▲시장근본주의에 대한 경계 ▲금융규제 개혁 ▲국제기구 개혁 ▲세계통화체제의 혁신 등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