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모든 성공적인 경제의 심장부에 시장이 있다고 믿지만 그 시장이 스스로 잘 작동한다고 믿지는 않는다.”


사진_끝나지 않은 추락ㅣ조지프 E. 스티글리츠 지음ㅣ장경덕 옮김ㅣ21세기북스 펴냄.jpg 21세기의 첫 10년이 잃어버린 10년으로 치부되는 현재 미국과 유럽, 나아가 세계는 어둠에 싸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최근 뉴욕 세계 비즈니스포럼에서 미국 연방준비은행과 유럽중앙은행의 긴축정책이 더블딥(Double Deep)을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한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발언이 세계 언론의 조명을 받은 적이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수퍼 이코노미스트’라는 별명이 붙은 스티글리츠는 <끝나지 않은 추락>에서 이 발언을 좀 더 구체화시켜 보여주면서 세계경제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거대한 은행과 금융회사들이 무너지고 그에 따른 경제의 혼란과 어지러운 구제 노력이 이어지는 가운데 미국의 우월주의는 끝났다. ‘시장근본주의’에 대한 논란도 끝났다. 오늘날 착각에 빠진 이들만이 시장에 자율조정기능이 있으며 사회가 시장참여자들의 이기적인 행동에 의지해도 좋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시장참여자들의 이기적인 행동이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건 물론이고 모든 일들이 정직하고 적절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해주리라고 믿어도 좋다고 주장한다.



지은이는 미국 경제가 아직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유럽발 대침체가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글로벌 통화전쟁을 예견했던 그는 이 책에서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던 글로벌 금융위기의 뿌리를 정확히 짚어내고 오바마 정부의 경기부양조치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또 금융계에 휘둘려 단기적인 부양책과 은행구제정책을 펼친 오바마 정부의 초기 대응을 부시의 정책과 다를 바 없다며 근본적인 개혁을 촉구한다.


무분별한 금융규제 완화를 위기의 최대 원인으로 꼽은 지은이의 분석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위기를 초래한 금융계는 어떤 이유로 그와 같은 행동을 했는지, 그들의 행동을 허용한 규제당국은 어떤 특수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는지 분석한다. 나아가 잘못된 정책을 낳았던 주류 경제학 이론에 대해서도 날선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온갖 이해관계와 사상, 이념이 얽힌 복합적인 문제라고 해석하는 지은이는 위기의 심층원인이 글로벌통화․금융시스템의 근본적인 결함에 있다고 강조한다.

이번 위기는 우리 사회의 갈라진 틈을 드러냈다. 월스트리트와 메인스트리트 사이의 틈, 그리고 미국 사회의 부유층과 그 밖의 계층 사이의 틈이다. 나는 어떻게 지난 30년간 상류층이 성공의 길을 달리는 동안 미국인들 대부분의 소득은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줄어들었는지 설명했다. (…) 소득 하위계층은 마치 소득이 늘어나는 것처럼 계속 소비하라는 말을 들었다. 심지어 중산층까지도 그랬다. 돈을 빌려서 소득수준을 넘어서는 생활을 하도록 부추기는 말이었다. 거품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 그들이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되면 그 다음은 뻔하다. 생활수준이 떨어져야 하는 것이다.


 

금융위기의 뿌리를 낱낱이 파헤친 지은이는 나아가 모조자본주의 시스템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처방을 제시한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한 금융시스템의 개혁을 주장하고, 새로운 글로벌 준비통화를 포함한 세계금융통화체제의 개혁을 제안한다. 공정하고 균형적인 사회를 위해 그가 제시하는 방안은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몇 가지 이슈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미국 정부와 국제기구의 행태를 비판하면서 그가 거듭 주장했던 금융시스템의 개혁과 세계경제의 지속적인 번영을 위한 국제 공조는 G20 정상회의의 핵심의제이며, 스티글리츠가 제안한 글로벌 준비통화 시스템은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치열한 논쟁거리인 통화전쟁에 대한 해법이다.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 끝은 아직 멀리 있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은 느린 기차의 난파와 같은 것이었다. 휘어진 길에서 기차의 속도가 지나치게 올라가면 그에 따른 엄청난 파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구조가 제대로 이뤄졌다는 말이 나오는 이때 분명한 건 임박한 참사를 피했다는 것뿐이다. 글로벌 경제는 벼랑 끝까지 갔다 되돌아왔다. 역사가 앞으로 어떤 길을 갈 것인지는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불확실하다. 연준이 기술 거품 붕괴 후 회복을 위한 전략으로 주택 거품을 만들어내는 정책을 취한 지 9년이 지났다. 그런 지금 이야기할 수 있는 건 경제의 회복이 굳건한 기반 위에서 이뤄지고 있는 게 아니며 글로벌 경제는 불안해 보인다는 것뿐이다.



더 나은 자본주의와 금융시스템을 위해 일종의 개혁론인 이 책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세계 경제동향에 이리저리 흔들릴 수밖에 없는 나라가 장기적인 번영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지은이는 글로벌위기를 전환점으로 정책과 사상에서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이는 단지 정치사회적으로 편리한 길이 아닌 세계인의 삶을 향상시키고, 또 다른 위기를 방지하며, 진정한 혁신을 앞당길 수 있는 변화를 뜻한다. 스티글리츠는 위기를 겪은 뒤 분명히 달라진 새로운 자본주의질서를 이해해야 하고,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선 새로운 금융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지은이는 또 21세기의 혁신적인 경제에서 정부는 앞으로 더 중심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적극 나서 실업이나 장애 등 개인에게 닥치는 위험에 대한 사회적 보호망을 제공하고, 시장의 역할을 강화하기 위해 혁신을 촉진해야 하며, 기업과 금융계의 착취를 방지해야 한다는 지은이의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