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학생들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많이 썼던 ‘수우미양가’를 기억할 것이다.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뀐 것처럼 수우미양가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우리나라에서 점차 사라지는 추세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말이 하루빨리 우리나라에서 사라져야 하는 이유는 비단 여기에 있지 않다. 수우미양가는 일본 센코쿠(戰國)시대의 용어로, 일본 사무라이들이 베어낸 수급의 개수를 평가하는 기준이었다.


사진_사쿠라 훈민정음ㅣ이윤옥 지음ㅣ인물과사상사 펴냄.jpg 기나긴 일제 침략의 역사와 식민지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이 땅에 이처럼 말에 얽힌 사연을 알고 나면 도저히 쓸 수 없는 일본말 찌꺼기가 아직도 생생히 살아 있다. <사쿠라 훈민정음>은 일본말 찌꺼기의 역사와 유래를 추적하면서 도저히 쓸 수 없는 놀라운 뒷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책은 ‘땡땡이’나 ‘야매’, ‘노가다’ 등 일본말 찌꺼기인 줄 짐작하면서도 쓰는 말뿐만 아니라 ‘방명록’, ‘애매모호’, ‘추신’, ‘서정쇄신’, ‘신토불이’와 같이 우리말인 줄로만 알고 쓰던 일본말 찌꺼기의 역사와 유래, 쓰임새에 대해 밝히면서 국어사전을 만드는 기관에 대한 애정 어린 비판을 잊지 않는다. 아울러 이 작업을 통해 일본에서 온 말이니 쓰지 말아야 한다는 단순한 주장 보다는 일본말 찌꺼기를 순화해야 하는 필연성을 제시해 읽는 이가 스스로 일본말 찌꺼기 사용에 대해 각성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츠쿠바대학의 하가 노보루芳賀登 교수는 “부락이란 미해방부락을 의미하며 차별받고 소외되어 있던 근세로부터의 천민신분으로 주로 예다穢多(천업에 종사하는 사람), 비인非人(죄인, 악귀 따위)들의 집단주거지를 일컫는 말”로 소개하고 있다. 요컨대 부라쿠민(ぶらくみん, 部落民)이란 전근대 일본의 신분제도 아래에서 최하층에 있었던 천민집단으로, 현재 일본사회에서 부락은 ‘터부’로 여겨지고 있을 만큼 요주의 단어다. 이곳에 사는 부락민들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는 노예나 다름없었고 인민이나 국민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오죽하면 ‘히닌’이었을까? 히닌(ひにん, 非人)이란 ‘사람 아닌 것이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라는 뜻이다. 이렇게 일본은 자신의 나라에서 쓰지 않는 말을 조선의 마을 이름에 갖다 붙였다.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인 천시’ 의식의 반영이다. 그런 의도로 들어온 부락이라는 말을 아무런 비판 없이 해방 이후에도 쓰고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또한 책은 일본이 우리에게 준 영향뿐만 아니라 우리가 오래전 일본에 문명을 전파하면서 남긴 흔적에 대한 이야기도 전한다. 지금으로부터 1400년 전 지어진 일본의 호류지(법륭사, 法隆寺)의 경우 고마샤쿠(고구려자, 高麗尺)를 사용해 축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고마샤쿠를 이용한 건축술은 당대 최고 통치자인 쇼토쿠 태자의 스승 혜자 스님과 고구려의 목수들이 전해준 것이다.


지은이 이윤옥은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독자적인 문화와 겨레말을 가진 우리가 일본말 찌꺼기를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대해야 하는지 묻는다. 더불어 잊혀가는 수많은 토박이말들 앞에서 일본어 찌꺼기가 우리말 어휘를 풍부하게 하는 것인 양 말하며 적당히 가려 쓰는, 또 국어순화운동을 꾸준히 펼치고 있지만 정작 국어사전에는 순화 이유를 밝히지 않는 무심한 태도가 지금과 앞으로의 우리 민족적 자부심에 끼칠 부정적인 영향을 걱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