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 않은 밥상>은 지난 1992년부터 십 수 년 동안 농민 운동을 해 온 시인이자, 운동가였던 서정홍이 산골 마을에 들어가 ‘농부 시인’으로 살아온 6년의 기록을 담고 있다. 경남 합천군 황매산 자락에 집터를 마련한 그가 1700만 원으로 흙집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지인들과 이웃들이 힘과 노력을 보탰기 때문이다.

사진_부끄럽지 않은 밥상ㅣ서정홍 지음ㅣ우리교육 펴냄.jpg 이후 이 집에는 생태 귀농에 관심 있는 어른들과 아이들, 대안학교 학생들은 물론, 자연과 더불어 살고 싶은 수많은 이들이 다녀간다. 자신을 농부라고 불러주는 것을 더 좋아하는 ‘농부 시인’ 서정홍은 “하늘과 땅이 하나이고, 자연과 사람이 하나이고, 삶과 죽음이 하나인데, 어느 하늘 아래 내 것이 있고 네 것이 있겠냐”며 이 집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묵었다 가기를 권한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고도 살아갈 수 있는 도시와 달리, 산골 마을에서는 앞집 뒷집에 누가 사는지를 모르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책은 농부 시인 서정홍이 ‘스승’으로 모셨던 가난하고 늙은 농부들의 삶을 따뜻하고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리고 있다.

 

큰 돌에 치여 뼈가 보일만큼 다쳤는데도 병원에 가기를 한사코 마다하고, 피 묻은 걸레 조각도 “깨끗이 빨아서 다음에 쓰모 되지, 이 아까운 걸 와 버리노”라고 손 사레를 치시는 아흔 살 인동 할머니. 그 앞에서 지은이는 환경이니 생명이니 떠들어 온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낀다. 또 농사꾼 흉내를 내고 돌아다니는 모습에 마음이 쓰여 ‘아침저녁으로 꾸짖어 주시던’ 설매실 어르신이 돌아가신 날, 지은이는 “오래 오래 잊지 않겠노라”고 거듭 어르신의 농사꾼 인생과 가르침을 가슴에 새긴다.

 

이처럼 못 배우고 가진 것 없는 죄(?)로 평생 농사지으며 살아온 가난한 농부의 삶,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그들에게서 인생의 지혜를 배우고, 마을에서 제일 젊은 죄(?)로 직접 상여를 메고 그분들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함께 하는 지은이의 모습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과 부끄러움을 전한다.

 

돈 많고 똑똑한 사람이 죽으면 온 나라 언론이 떠들썩할 텐데, 남의 밥상을 차려 주느라 평생을 농사지으며 살아온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날엔 흔한 화환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손바닥 뒤집듯 멋대로 바뀌는 농업 정책과 농업을 무한 경쟁의 부속물로 만들어 버리는 정치꾼들의 행태에 더 참을 수 없어, 서울 여의도까지 달려와 “이놈들아, 너희들을 살리려고 이 늙은 할배 할매가 서울까지 왔다”고 절규하는 늙은 농부들, 이들에게 앞으로 우리 농촌이 어떻게 될 것 같냐고 물으면 하나같이 “우리가 죽으면 끝나는 거지”라는 답이 돌아온다. 이분들이 다 가시고 나면, 누가 우리 아이들의 밥상을 차려줄 것인가.

 

하지만 이 책은 한탄과 아쉬움을 토로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각기 다른 이유로 산골 마을을 찾아와 새로운 삶을 꾸려가는 이들의 삶에서 작지만 뜨거운 희망의 불씨를 전하고 있다.

 

‘가난해서 집도 없고 논밭 한 뙈기 없어도 좋지만 착하고 성실한 농부’라면 혼인할 수 있다며, 산골 마을 농부 정상평 씨와 결혼한 최영란 씨. 이들 부부 사이에서 첫눈이 내리는 날, ‘거기도 눈이 오냐며’ 안부 인사를 전하는 구륜이가 태어나 밝고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기다림은 아름답고도 슬픈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기다림 속에서 하루하루를 사는지도 모릅니다. 만약 기다림이 없다면 무슨 맛으로 험한 세상을 살아가겠습니까. 그래서 오늘도 기다리는 것입니다. 저 빈집이 다시 좋은 인연을 맺어 줄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가진 것은 없어도, 마음 넉넉한 사람들을….


 

또한 지은이의 흙집 앞, ‘빈집’에 묵은 것을 인연으로 혼인의 연을 맺게 된 박상아 씨와 정청라 씨, 이들이 전통 혼례를 올리던 날에는 모든 마을 사람들이 아들, 딸을 시집, 장가보내는 마음으로 축복의 기쁨을 나눴다. 이런 인연들을 바탕으로 지은이는 아직 오지 않은, 이 시대 수많은 형들에게 함께 ‘희망의 텃밭을 일구자고’ 손을 내밀고 있다.

 

책은 “함께 부끄럽지 않은 밥상을 차리자”는 투박하고 뜨거운 마음을 내보이고 있다. 지금 사는 것이 행복하지 않다면,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르겠다면, 막연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다면, 이 책을 통해 ‘부끄럽지 않은’ 삶으로 나아가는 힘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