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회의 일상은 경쟁의 연속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한다. 그런 삶 속에는 어쩌면 승자도 패자도 없다. 쳇바퀴 도는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갈구하는 것은 그래서 모든 도시인의 꿈이다. 하지만 상상의 일을 실현하기는 쉽지 않다.


사진_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ㅣ공지영 지음ㅣ오픈하우스 펴냄.jpg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는 공지영 작가가 그 벗인 낙장불입 시인, 버들치 시인과의 인연으로 지리산을 찾으면서 만나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제각기 다른 이유에서 도시를 떠나온 사람들. 인생의 끝자락을 지리산에 의탁한 사람부터 스스로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사람까지 다양하다. 모여든 사연은 제각기 다르지만 지리산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들은 모두 필연이든 우연으로 엮이고,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지리산을 등지고 섬진강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굳이 그들이 누군가 알려고 하지 않으시면 더 좋겠다. 다만 거기서 사람들이 스스로를 사랑하고 느긋하게 그러나 부지런히 살고 있다는 것, 그래서 서울에 사는 나 같은 이들이 도시의 자욱한 치졸과 무례와 혐오에 스스로를 미워하게 되려고 하는 그때, 형제봉 주막집에 누군가가 써놓은 싯귀절처럼, “바람도 아닌 것에 흔들리고 뒤척이는” 도시의 삶이 역겨워질 때. 든든한 어깨로 선 지리산과 버선코처럼 고운 섬진강 물줄기를 떠올렸으면 싶다.



지리산 학교가 만들어지는 분주한 풍경이 담겨 있는 이 책에서 지은이는 이미 그들은 ‘행복학교’에 살고 있었던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책 속 인물들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각각의 주인공이 우리들 자신임을 알 수 있고, 가볍고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의 의미를 깨쳐가는 기쁨과 용서 받을 수 없거나 영원할 것 같은 비극의 그림자도 결국 시간의 품속에서 생명을 빛이 깃드는 벅찬 감격을 만날 수 있다.


책은 ‘공지영이 바라보는 지리산 행복학교’로 풀이할 수 있다. 지은이는 50만원만 있으면 1년은 버틸 수 있는 지리산에서 살지 않고 아직도 서울에 거주하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주변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지은이는 버들치 시인의 단잠을 깨우는 ‘서울 것’이나 등불의 저주의 대상이 되는 ‘눈 큰 서울 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목마른 자가 샘물을 찾듯이 일상의 풍상에 사람이 그리울 때 그는 가방을 싸고 지리산을 찾는다. 그 때마다 얼굴도 사연도 다른 사람들을 만난다. 제각기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는 그들은 산을 지키고, 나무를 가꾸며, 식당을 열고, 사진을 찍고, 옷장사를 시작한다. 그들에게는 어떤 믿음이 있으며, 그 믿음 속에서 지은이는 어렴풋이 행복을 본다. 그 곳에서 사람들은 ‘지리산 학교’를 만들 때 지은이는 이를 두고 ‘행복학교’라고 말한다.


“아부지 생각에 세상은 바뀐다. 낭구라 카는 거는 십년 멀리 내다보는 기 아이라. 이십 년 삼십 년을 내다보는 기라. 아부지가 지난해에 밤을 심었는데 이제는 매화낭구를 심어 매실을 얻을 끼고 그 담엔 차를 심을끼라. 그라믄 차를 따겠제. 지금 마을 사람들이 아부지 낭구 심는 거 보고 뭐라 캐도 너거는 신경쓰지 말그래이. 봐라. 아부지가 매일 낭구를 심으면 우부지가 죽기 전에 가져갈 것은 실은 아무것도 엄다. 그러나 너거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는 여기서 수많은 것들을 얻을 끼고 너거들이 낳은 아그들, 그러니까 내 손주들 대에는 이 산의 나무만 가지고도 그냥 살 날이 올기다. 아비의 생각은 마 그렇다.”



버들치 시인의 친구인 최도사는 주차관리요원으로 연봉은 200만원. 서울로 떠난 빈 집에 기거하며 꽃을 심어 연못까지 만들었다. 산을 오르내리며 약초를 캐고 술을 담근다. 사람들은 그가 세상만사를 꿰뚫는 도사라고 생각한다. 그의 친구 버들치 시인은 제법 유명한 시인이었다. 하지만 지리산에서 살면서 슬픔을 잃어 이제는 시를 쓸 수 없다. 그는 닭을 키우고, 버들치를 돌본다. 두 사람은 각각 스쿠터를 타기로 하고 원동기면허 시험을 보기도 한다. 어느 날 버들치 시인은 원고료를 받아 식당에서 밥을 사려하는데 최도사는 한사코 '사리'를 주문한다. “시인이 무슨 돈이 있냐”면서.

“문수 스님은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어. 보통 분신한 사람이 3도 화상을 입고 병원에 있다가 죽게 되는 것과 다르지. 그 이유는 그분이 내장까지 완전히 연소하도록 석유를 드셨기 때문이야. 그러면서도 가부좌를 틀고 입가에는 미소까지 지은 채로 돌아가셨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것은 생과 사가 이미 하나이고, 중생과 내가 이미 하나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야. 그분은 최근 3년 동안 벽만 보고, 넣어주는 하루 한 끼 밥만 먹고도 그걸 깨달으신 거야. 이제 내가 죽어야 할 차례인 것 같은데 낙시인, 나는 아직도 죽음이 두렵다. 그러니 나는 신도들에게 절을 받을 자격이 없는 중인거야.”



이 책의 주인공들은 모두 그렇게 살아간다. 그들 모두 도시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그저 없는 사람들, 즉 가난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에겐 눈치를 봐야할 상사도 없고, 짚 밟고 일어서야할 경쟁자는 더욱 없다. 그들 스스로를 돌보고, 또 그들끼리 서로를 돌본다. 그래서 일까 그들에게는 큰 슬픔은 더 없어 보인다. 슬픔이 없는 곳에 행복이 있는 것일까? 지은이는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행복의 의미를 되새긴다. 지은이는 “도시의 삶 속에서 힘겨울 때, 그들의 이야기를 떠올리라고 아마도 청명한 바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