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는 인간의 역사를 돌아보는 가장 기본적인 키워드지만, ‘경제사’는 늘 보통 사람들의 어제와 오늘, 내일의 삶을 설명하기엔 어렵고 지루한 분야일 수도 있다.

 <문답으로 읽는 20세기 한국경제사>의 지은이 정태헌은 구한말부터 일제 식민지 시기, 해방 이후까지 100년 이상의 한국 근현대사에서 경제사와 관련된 21개의 질문을 내놓고, 흡사 작은 강의실에서 대화하듯 일상용어를 사용해 의문을 풀어나간다. 숫자들이 말하는 성장의 지표를 보통 사람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읽어내야 할 것인지, 골치 아픈 갖가지 ‘론’은 어떤 상식적 고민으로부터 출발한 것이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책은 우선 구한말과 대한제국 시기, 대한민국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전근대사회를 넘어서고자 노력하고 있었나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책에 따르면, 일제 치하에서도 경제활동은 이뤄졌다. 그렇다면 식민지 조선인들은 어떤 식으로 불가능한 경쟁에 뛰어들고, 패배했을까? 엄혹한 독재의 시기,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룬 주역은 과연 누구였을까?

 

책 전반에 이어지는 21개의 질문은 한국사회 격동의 근현대사에서 고비를 이뤘던 경제사의 중요한 지점을 두루 아우르고 있다.

 

지은이는 서구유럽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성립된 ‘근대’라는 개념을 무조건 한국사에 적용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마땅한 개념이 없으니 일단 ‘식민지적 근대’라고 불러봅시다”라고 말을 잇는다. 이는 한편으로 근대와 조우한 구한말 조선사회의 역동적 발전상을 서구와 일본제국주의의 잣대로 폄하하는 식민사관을 경계하는 일인 동시에 피식민지로서 겪었던 수탈을 전제한 개발, 주권국가 없는 자본주의라는 모순과 비극의 역사를 직시하자는 제안이기도 하다.

 

지은이는 또한 해방과 전쟁, 독재의 시대를 거치면서 어렵게 쟁취한 ‘주권국가’와 ‘민주주의’야말로 한강의 기적을 가능케 하고 IMF 경제위기를 헤쳐 나오게 한 저력이었음을 거듭 강조한다. 민주주의는 과거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수많은 신생독립국들 사이에서 대한민국이 눈부신 성취를 일궈낸 비결이기도 하다. 여전히 신자유주의 세계질서 속에서 위기에 처해 있는 대한민국이 한 걸음 더 성장해나가기 위해 필요한 열쇠도 민주적인 자본주의, 분배정의를 실현하는 조화경제에 있다는 것이 지은이의 생각이다.

 

21세기 민족경제론은, 성장과 분배의 관계를 보완적으로 설정하는 ‘조화경제’의 철학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국민경제의 생산성이 높아지고, 민주화의 내실이 채워져야 공동체도 시장도 살 수 있습니다. 빈곤을 대물림할 비정규직이 급증하고 체념하는 인간군이 많아지면, 국민경제의 안정과 장기적 발전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국가의 조정역할 수행여부는 아래로부터의 압력, 즉 우리 사회의 민주화수준에 달려 있습니다. 보수적 집권세력이 시장만능론에 의해 삶을 위협당하는 저소득계층의 삶과 정서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한국 경제는 그야말로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될 것입니다.


 

책은 보통 사람들의 노동이 경제성장의 과실로 열매를 맺고, 그것이 다시 보통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당연하게 전제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바로 건강하고 민주적인 ‘주권국가’의 존재다.

 

일제시대 조선총독부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노동, 그리고 생명과 인권조차 일제의 영광을 위해 소모하고 착취했다. 해방 이후 독재정권들은 정권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국민적 권위가 필요했기에 가시적 경제지표에 매달렸다. 결국 누구보다 땀 흘려 노력하는 서민들이 고생한 보람을 느끼고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분배정의’는 공짜로 얻어질 수 없었다.

 

20세기 한국경제사는 좀 더 나은 분배와 조화를 위해 끊임없이 일하고 싸워온 ‘국민’들의 치열한 걸음걸음에 다름 아니었다. IMF 이후 여전히 세계경제위기 속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대한민국사회에 지은이가 내놓는 희망 역시 그 길에 있다. 성장하는 만큼 분배하고, 분배한 만큼 더 성장하는 조화로운 자본주의를 향한 희망이 바로 그것이다.

 

지은이는 21세기 한국경제사의 희망은 여전히 ‘민주주의’에 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