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의 종언이 회자되면서, 자본주의가 앞으로 어떤 모습과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에 대해 많은 물음들이 있어 왔다. <자본주의 :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는 인류의 여명기에서부터 21세기 신경제(New Economy)까지 시장 경제와 자본주의의 역사를 돌아봄으로써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대답하고 있다.

사진_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ㅣ로버트 하일브로너, 윌리엄 밀버그 지음ㅣ홍기빈 옮김ㅣ미지북스 펴냄.jpg 책은 오늘날 자본주의 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많은 문제들, 즉 지구화, 정보기술의 발달, 빈곤과 불평등의 심화, 저발전의 문제, 생태적 과부하 등 기존의 경제사에서는 서술하지 않는 내용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논하고 있다. 미국의 진보적 경제학자 로버트 L. 하일브로너와 윌리엄 밀버그가 지은 이 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조금씩 만들어왔던 물질적 생산과 분배를 둘러싼 극적인 사회적 힘들을 재현하고 있다.

 

지은이는 현대의 경제학 이론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해 왔다. 현실의 경제생활과 유리돼 자신만의 독자적인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체제로 자본주의를 묘사하는 경제학은 자본주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시각은 주류 신고전파 경제학은 물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과도 이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신고전파 경제학이나 마르크스 경제학이나 ‘경제’라는 영역이 그 자체로 운동 법칙을 내장한 채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본주의 경제는 일종의 초역사적인 것으로 변해 시간적 차원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스스로의 고유한 구조와 논리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다른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힘들에 의해 계속 진화한다. 때문에 자본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선 독자적인 경제 체제가 아니라 사회 속에 묻어 들어있는 관계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 지은이의 주장이다. 즉 자본주의 자체의 역사적 변화를 포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러한 관점에 입각해 경제학 이론과 경제사를 혼합해 이론을 통해 역사를 조망하고, 또 역사를 통해 이론을 조망하는 복합적인 방법으로 자본주의 경제에 접근하고 있다.

 

지은이에 따르면, 한 사회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물질적 조달과 사회의 재생산이라는 ‘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이 필요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경제 체제는 이러한 생산과 분배의 문제를 풀기 위한 인류의 오랜 노력에 있어서 독특한 단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사회들을 전부 돌아봐도 인류가 생산과 분배를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방식은 오로지 세 가지(혹은 그 세 가지의 조합)밖에 없었다. 전통에 의해 운영되는 경제, 명령에 의해 운영되는 경제, 시장에 의해 운영되는 경제가 바로 그것이다.

 

우선 전통의 방식이란, 아주 먼 옛날 발명돼 오랜 역사 속에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관습과 신앙이라는 강력한 힘으로 유지돼온 여러 절차들에 기초해 생산과 분배를 조직하는 방식이다.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들의 삶의 방식에서부터 오늘날 중산층 가정의 아이들이 사무직을 선호하는 경향까지, 이 방식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또 아주 최근까지 압도적으로 지배적이었던 방식이다. 그런데 이 메커니즘은 경제 문제에 있어 정태적이며 보수적이다. 전통은 그 본질상 변화를 억제하기 때문에 이 경우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지만 경제적 진보는 포기해야 했다.

 

경제적 존속의 문제를 해결하는 두 번째 방식은 권위적인 명령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례를 이집트와 로마, 중국의 거대한 고대 건축물들에서, 남북전쟁 이전의 미국 노예 경제에서, 그리고 소비에트연방의 계획 경제에서 발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서도 명령 방식은 ‘조세’라는 완곡한 방식으로 살아있다. 전통 방식과 달리, 명령의 방식은 본질적으로 경제적 변화를 억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사회가 스스로에게 경제적 변화를 강제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바로 명령이다. 전통 방식을 사회적·경제적 변화를 저지하는 거대한 제동 장치에 비유한다면, 경제적 명령이라는 방식은 변화를 재촉하는 거대한 박차에 비유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시장의 방식이 있다.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겠지만, 시장은 사회로 하여금 전통이나 명령에는 최소한만큼만 의지하면서도 그 스스로의 필요를 조달하는 실로 놀라운 모습을 보여준다. 애덤 스미스가 지적한대로, 시장 체제는 혼란과 무질서는커녕 자기 조정 메커니즘을 갖춘 실로 가장 질서정연한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 경제사는 시장 체제가 그렇게 완벽하거나 완결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들로 가득하다. 시장의 작동으로 인해 우리는 오늘날 여러 가지 문제를 겪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경제학이 주요하게 다루는 문제들이다.

 

한 사회가 대중들의 생활수준을 올리고자 할 때 제일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더 많은 생산’이다. 개개인들의 생활이 개선되려면 재화와 서비스 생산이 인구보다 빠르게 증가해야 한다. 18세기 말에 영국에서 시작한 산업 혁명은 바로 그러한 생산의 증대가 비약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노동 현장은 실로 소름끼치는 것이었다. 장시간의 고한 노동, 공장이 사방에 토해내는 소음,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는 작업장, 4살배기까지 동원되는 아동 노동 등, 이 모든 것들은 초기 산업 자본주의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시켰고, 그러한 평판은 결코 만회되지 않았다.

 

여기서 지은이는 가난한 경제가 성장하는 경제로 전환하기 위해 거칠 수밖에 없는 과정에 대해 지적한다. 생산을 증대하고 생산성을 끌어올리기 위해선 자본재에 대한 투자가 선행돼야 하는데, 여기에는 반드시 저축이라는 행위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저축은 곧 투자를 위해 현재의 소비를 미래로 돌리는 것이다. 그래서 최초의 저축 수준이 낮다면 성장률도 따라서 낮아질 수밖에 없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자본주의 전반의 역사 속에서 오늘의 경제 사회를 되돌아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산업 혁명, 대공황, 뉴딜과 자본주의 황금시대 등 자본주의 역사의 굵직한 전환점들이 인류의 경제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두루 살펴보고 나면 우리는 이 책에서 오늘날의 세계 경제를 만나게 된다. 이는 크게 신자유주의, 세계 빈곤, 정보 기반 사회 등 세 가지 이슈와 관련돼 있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자본주의가 여러 개의 상충되는 이념들로 구성되며 진화해왔음을 보여준다. 자본주의는 경제학 교과서의 추상적이고 완결된 이론 속에 있지 않다. 자본주의는 언뜻 모순돼 보이는 여러 아이디어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지난 역사에서 맞닥뜨린 수많은 문제들과 정치적·사회적 압력에 대처하며 자신의 모습을 유동적으로 변모시켜왔다.

 

지은이는 유토피아적 이상으로서의 사회주의라는 구호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인간적 가치가 최고도로 실현될 수 있는 최상의 형태로 자본주의를 바꿔나가는 것을 당면한 실천적 과제로 제시한다. 자본주의 자체의 끊임없는 역사적 변동을 그려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