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지병 악화로 타계한 리영희 선생은 참 지식인의 전형으로 일반의 귀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20세기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내야만 했던 그는 고단한 82세의 삶을 마침내 내려놓게 됐다.

 

1970, 80년대 억압적이고 모순적인 군사정권과 사회를 향해 쏟아냈던 서릿발 같은 선생의 글들과 그에 따른 ‘진실 추구자’로서의 실천적 삶은 그를 투옥과 연행, 감금이라는 형극의 길로 이끌었다. 하지만 동시대 많은 지식인들과 젊은 세대들에게는 인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를 일으키는 계기가 됨으로써 ‘시대의 방향타’, ‘어둠을 밝히는 빛’의 역할이 됐다.

 

‘리영희’라는 이름 석 자에 따라붙는 형용구는 몇 가지로 압축되지 않는다. 우리 시대 사상의 은사, 분단시대의 모범적인 지식인이자 사상가, 현대 지성사의 큰 별, 시대의 양심, 탁월한 언론인이자 학자, 자유인과 등 늘어놓고도 참 모습을 드러내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희망>은 다시 읽어도 번득이는 선생의 사상적 정수와 함께 빼어난 문장력과 문학성을 담지한 대표적인 명편들을 ‘산문선’이라는 이름 아래 <리영희저작집(전12권, 2006)>에서 가려 뽑아 한 권으로 엮은 책이다. 정세 분석으로 널리 알려진 사회과학적인 논문보다는 오히려 그런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도록 연동해낸 사상적인 바탕을 이루는 인문학적인 글들을 엄선하는 데 방점을 두고 있다. 민족분단의 비극, 통일론,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독재체제와 민주주의 투쟁 등 사회과학적인 담론과 함께 주시해야 할 주제는 인간 존재론, 역사, 평화, 신앙, 자연, 예술 등 지역과 세대를 초월한 삶의 슬기를 다룬 글들이다.

 

“진리와 진실이 극단에 있지 않고

두 극단 사이의 어느 곳에 있다는 깨달음은

사람을 토론과 타협과 관용의 정신으로 이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준다.

양극단에서 안으로 위치를 옮기면

서로가 적이 아니라 다만 의견이 조금 다른 ‘이웃’임을 알게 된다.”

- ‘우상과 이성’ 중에서


 

가까운 곳에 살며 만년을 지켜보기도 했고, 2005년 구술자서전 <대화>가 출간되는 데 산파 역할을 했던 문학평론가 임헌영은 “‘족한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則不殆)’는 평온의 경지를 즐기셨기에 감히 다른 부담을 보탤 용기가 안 났다”며 이미 이 책의 편(篇)을 염두에 뒀다고 고백한다.

 

선생에게 글쓰기란 우상을 파괴하는 이성의 회복 활동이었다. 그러나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는 고통을 무릅써야 하는 괴로운 길이기도 했다. ‘우상’이란 그의 고향 평안북도 말로 ‘어둑서니’에 해당된다. ‘일종의 어둑귀신으로서, 어두운 밤에 아무것도 없는데 있는 것처럼 잘못 보이는 물체나 헛것’, 우리 식으로는 도깨비에 해당하는 말인데, 이를 두고 그는 “어린 시절 북쪽나라 고향에 사는 어둑서니는, 나와 같은 어린이들이 (밤길을 걷다가) 땅 위를 내려다볼 때, 처음에는 달걀만한 작은 크기이지만 무서워서 올려다보기 시작하면 점점 더 커지고, 겁에 질려서 하늘을 바라보면 그 크기가 하늘 전체를 시커멓게 덮을 만큼 무서운 형상이 되어 뒤를 쫓아오곤 했다”고 회고한다. 온갖 거짓으로 꾸며진 권력과 철학, 학문과 신앙과 교육과 언론매체들이 이런 어둑서니로 진실에 다가가려는 이성을 학살하고 있다는 것이 그가 언제나 인식한 현실진단이었다.

 

글쓰기의 사표로 늘 존경하고 좋아했던 노신을 선생은 글 곳곳에서 빈번히 인용하고 있다. 특히 노신의 <눌함>의 ‘자서’에 나오는 “빛도 공기도 들어오지 않는 단단한 방”을 곧 우상에 사로잡힌 극한상황에 견주기도 했다. 견고하게 밀폐된 방 안에서 죽음을 조용히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괴로운 일일 수도 있지만, 선생은 지식인으로서 벽에 작은 구멍이라도 뚫어 밝은 빛과 공기를 넣어주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럴 때 우상은 파괴되고, 사회는 진보하며, 희망은 있다고 봤다. 이는 노신의 문학관과 일치하는 대목이며, 이 책의 제목을 ‘희망’이라 지은 이유다.

 

이 책은 고단한 현대사의 사슬을 끊는 프로메테우스의 우상을 파괴하는 지혜와 슬기, 한 시대의 고전으로 자리 잡은 선생의 말과 글을 우리 곁에 머물게 해준다.  

사진_희망ㅣ리영희 임헌영 지음ㅣ한길사 펴냄.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