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30대 초반 한 젊은 극작가가 세상을 떠났다. 알려진 바대로 그는 병든 몸으로 이웃에게 밥과 김치를 꿔야 할 정도로 가난에 시달렸다고 한다. 애석하게도 빈곤은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만연해 있다.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 시스템이 그들의 존재를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의 발단을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는 사회, 개인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틀에 가둬놓고 무조건 노력만 하라고 강요하는 사회, 그런 사회에 사는 개인은 불행하고, 사회도 발전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런 사회를 바꾸기 위해선 개인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혹여 ‘왜 나서야 하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빈곤한 사람들의 문제를 남의 일이라고 외면한다면, 그 영향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올 수도 있다.

 

이미지_ 한 끼의 권리, 오하라 에쓰코, 최민순, 시대의창.jpg *한 끼의 권리, 오하라 에쓰코/최민순, 시대의창.

 

<한 끼의 권리>는 빈곤의 한 가운데 있는 ‘굶주림’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것을 줄이는 한 방법으로 푸드 뱅크를 제시한다.

 

‘남아도는 음식을 어려운 사람에게.’ 푸드 뱅크는 상품 가치가 없어서, 다 먹을 수 없어서 등의 이유로 ‘버려질’ 운명에 처한 음식들을 기부받아 먹을 것이 절실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눠 주는 곳으로, 지난 1967년 미국에서 처음 생겼고, 2008년 현재 미국에만 200여 개가 있다.

 

푸드 뱅크를 처음 창안한 ‘미국 푸드 뱅크의 아버지’ 존 헨겔은 우연히 한 싱글맘과 얘기를 나누다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됐다고 한다. 사형수 남편을 둔 그에겐 아이가 여럿 있었는데, 가까운 슈퍼의 쓰레기통을 뒤져 아이들 먹을거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그는 헨겔에게 말했다.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에요. 다만 쓰레기통에서 줍는다는 게 조금 그렇지만요. 쓰레기통에 버리지 말고 어디 다른 곳에 놓아 주면 좋을 텐데.” 그 길로 달려가 그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한 헨겔은 매장 책임자를 찾아가 “먹을 수는 있지만 팔 순 없어 버려야 하는 식품이라면 차라리 기부를 해 달라”고 요청한다. 헨겔의 푸드 뱅크 운동은 이렇게 시작됐다.

 

배고프지 않을 권리를 지키자

 

✔ 푸드 뱅크는 굶주림에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전해 주는 활동을 한다는 점에서 안전망(safety―net)이 되고는 있지만, 미국에서 굶주림이 만연하고 악화되어 가는 근원에 초점을 맞추지는 못한다. 오히려 푸드 뱅크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위기적인 상황에 놓인 굶주림에 대한 지속적인 해결책을 애써 외면할 우려가 있다. (…) 매년 2300만 명이 넘는 미국인이 긴급 식료품 원조를 필요로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식료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빈곤 때문이다. 1300만 명이나 되는 미국 어린이들이 매일 끼니를 거르는 것도(부모는 대부분 일을 하고 있다), 부모들이 집세나 광열비, 의료비나 교통비를 내고 나면 가족에게 필요한 식료품을 충분히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푸드 뱅크가 여러 문제에 봉착해 있다고 한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기부량이 크게 줄어들었다는 점. 푸드 뱅크에 주로 기부해 주던 곳이 기업들인데, 그 기업들이 운송·포장 기술이 발달하면서 상품을 ‘덜’ 버리게 된 것이다. 이전엔 내용물은 성해도 캔이나 포장 박스가 우그러진 것들은 구매자들 성화로 어쩔 수 없이 버릴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것들을 모아 저가로 파는 할인점들이 생긴 것이다. 이런 할인점들에선 유통 기한이 지난 것들도 취급한다. 유통 기한이 지나도 어느 선까지는 안전하게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런 할인점을 찾는 소비자가 계속 늘고 있다.

 

푸드 뱅크는 당장의 배고픔만 때워 주는 ‘반창고’ 역할을 할 뿐 ‘빈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비판도 받는다. 푸드 뱅크 활동이 국가나 사회적인 차원의 빈곤 문제 해결을 미루게 하는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난황에서 푸드 뱅크 관계자들은 ‘물에 빠진 아이’를 비유로 들면서 푸드 뱅크 역할을 강조한다. 강가를 거니는데 강에 한 아이가 떠내려온다. 강물에 뛰어들어 아이를 구해 냈는데 또 한 아이가 떠내려온다. 또 떠내려오고 또 떠내려오고를 반복한다. 사실은 강 상류에서 아이를 한 명씩 물에 빠뜨리는 악당이 있었던 것이다. 이 악당을 잡지 않는 한 아이를 구하는 일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악당을 잡을 때까지, 아이가 수영을 배워 스스로 헤엄쳐 나올 수 있을 때까지 누군가는 떠내려오는 아이를 구해 내야 한다. 기아 같은 문제에 장기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사람들이 분명 필요하듯, 눈앞의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그들을 구제하는 일 역시 누군가 할 일이라는 것이다.

 

책은 ‘남는 거니까’ ‘어려운 사람이니까 전해 주기만 하면 되니까’와 같은 생각에서 나아가 실제로 그것을 받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끊임없이 ‘상상’할 수 있는 진정한 나눔의 자세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지데일리/사회]